2020-04-06 11:37
[기자수첩] ‘기생충’이 남긴 것
[기자수첩] ‘기생충’이 남긴 것
  • 이영실 기자
  • 승인 2020.02.21 1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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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살면서 가슴속에 묻어둔 애국심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순간들이 있었다. 태극전사들이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냈을 때 그랬고, ‘피겨퀸’ 김연아가 세계 최고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그랬다. 세계 각국에 가수 싸이(PYS)의 ‘강남스타일’ 돌풍이 불었을 때도 그랬고,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빌보트 차트에서 세계적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때도 그랬다.

그리고 또다시 ‘국뽕’에 취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백인들의 잔치로 여겨졌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인’과 ‘한국어’로만 이뤄진 한국영화 ‘기생충(PARASITE, 감독 봉준호)’이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을 포함, 무려 4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단단해 보이기만 하던 ‘오스카의 벽’을 완전히 깨버린 것이다.

“봉준호우(Bong June Ho).”

‘푱창(Pyeongchang)’을 뛰어넘는 감동이었다. 후보 발표(6개 부문 노미네이트)를 포함해 ‘봉준호’와 ‘PARASITE’가 최소 10번은 불렸는데, 호명될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졌고 소름이 돋았고 주책맞게 눈물까지 고였다. 오랜만에 애국심이 제대로 타올랐는데, 기자뿐 만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오스카 효과’는 소문대로 어마어마했다. 이미 제작비의 17배를 넘게 벌어들였는데, 북미 지역에서 역대 외국어 영화 흥행 4위로 올라서는 등 흥행세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또 최근 공개된 ‘기생충’ 흑백판까지 열기가 이어지고 있어 신드롬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경제적 효과뿐 아니라 한국영화‧한국문화의 위상을 드높이며 세계화에 한발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됐다. ‘기생충’ 주역들은 할리우드를 포함해 해외 진출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고, 굳이 해외로 향하지 않더라도 완성도 높은 작품을 통해서라면 전 세계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힘을 보여줬다. 또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토종’ 한국 콘텐츠의 가능성을 입증한 성과이기도 하다.

내부적으로는 한국영화 제작 환경 개선을 기대하게 만든다. 봉준호 감독은 모든 스태프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물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격 없이 소통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특히 표준근로계약서 작성·주 52시간 근로시간 가이드라인을 철저하게 지키는데, ‘기생충’ 현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우 송강호가 “봉준호 감독의 정교함이 가장 빛난 것은 밥때를 칼같이 지켜줬다는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봉 감독은 제작진과 배우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의 복지를 제공했다고 한다. 공정한 노동 환경에서 만들어진 ‘기생충’이 세계적 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기생충’의 솔선수범은 영화계를 넘어 업계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가 모아진다. 제작 환경과 근로 여건 등 고질적인 문제점에 대한 개선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도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면서, 한국영화 산업의 질적 성장을 기대하게 한다.

‘기생충’이 쌓아올린 업적은 어쩌면 한국영화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역대급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발판 삼아 한국영화는 계속 나아갈 것이고, 발전할 것이다. ‘기생충’의 쾌거가 과거의 영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새롭게 시작될 역사의 큰 밑거름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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