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이영실 기자 “60살 넘어서부터는 사치하고 살기로 작정했다. 내가 말하는 사치는 좋아하는 사람의 것(작품)은 하고, 싫어하는 사람의 것은 안 하는 거다. 돈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작품을 한다.”
말이 필요 없는 배우 윤여정이 작품 선택 기준을 묻자 내놓은 대답이다. 올해로 74세가 된 ‘노배우’ 윤여정은 분량이 많든 적든, 규모가 크든 작든, 출연료가 있든 없든, 마음을 흔드는 시나리오라면 언제든 온몸을 내던진다. 그의 ‘사치’가 값진 이유다.
1966년 연극배우로 데뷔한 뒤 올해로 연기 인생 54년 차를 맞은 윤여정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여전히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올해도 쉴 틈이 없는데, 현재 방영 중인 MBC 주말드라마 ‘두 번은 없다’와 지난달 19일 개봉한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감독 김용훈)로 대중과 만나고 있고, 독립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감독 김초희) 개봉도 앞두고 있다. 또 할리우드 진출작인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도 기대를 모은다.
스크린에서의 활약이 돋보인다. 먼저 윤여정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평생 지켜온 모든 것을 잃은 후 아무도 믿지 않고 깊은 과거에 갇혀버린 치매 노인 순자 역을 맡아 짧지만 강렬한 열연을 펼쳐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순자는 치매 노인임에도 가장 현실을 직시하는 인물로 때때로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윤여정은 ‘두 팔, 두 다리만 멀쩡하면 언제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어’라는 순자의 대사를 특유의 독보적 분위기로 소화, 감탄을 자아낸다.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전도연도 “윤여정 선생님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고 했을 정도로 윤여정은 순자 그 자체였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평생 일복만 터졌는데 실직 후 전에 없던 복이 굴러들어오는 찬실(강말금 분)의 이야기를 기발하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윤여정은 정 많은 주인집 할머니 복실로 분해 무심한 듯 보이지만 세심하고 따뜻한 매력으로 극의 중심을 잡는다.
할리우드 독립영화 ‘미나리’ 속 활약도 기대를 모은다. 할리우드 톱배우 브래드 피트가 설립한 플랜 B가 제작한 ‘미나리’는 198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따라 미 아칸소주의 농장으로 이주한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담았다. 윤여정 외에도 배우 한예리, 스티븐 연 등이 활약한 ‘미나리’는 제36회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수상,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또 최근 미국 매체 어워드와치(Awards Watch)가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강력 후보 10인을 선정해 발표했는데, 윤여정이 메릴 스트립, 케이트 블란쳇 등 쟁쟁한 할리우드 배우들과 함께 이름을 올려 화제가 됐다.
특히 윤여정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무료로, ‘미나리’는 소액의 출연료만 받고 출연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진행된 ‘찬실이는 복도 많지’ 언론배급시사회에서 그는 출연료와 상관없이 두 작품을 택한 이유로 “진심으로 쓴 이야기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독립영화도 여러 종류의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며 “작은 예산으로도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다양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독립영화, 한국영화를 향한 각별한 애정으로 큰 힘을 불어넣고 있는 윤여정. 그의 행보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