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인생 30년을 맞은 배우 권해효. /인디스토리
연기인생 30년을 맞은 배우 권해효. /인디스토리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배우 권해효는 연기인생 30년 동안 상업영화부터 독립영화, 드라마와 연극까지 종횡무진하며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가부장적인 가장부터 무능력한 직장상사, 권력욕에 사로잡힌 간신 등 다양한 캐릭터를 탄탄한 연기력으로 소화, 대중의 신뢰를 받아왔다.

오는 27일 개봉하는 영화 ‘후쿠오카’(감독 장률)에서는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편안하면서도 생경한 얼굴을 보여준다. ‘후쿠오카’는 28년 전, 한 여자 때문에 절교한 두 남자와 귀신같은 한 여자의 기묘한 여행을 담은 작품.

영화 ‘망종’(2005), ‘두만강’(2009), ‘경주’(2014),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등을 연출한 장률 감독의 신작으로, △제69회 베를린영화제 △제9회 베이징국제영화제 △제21회 타이베이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들 공식 초청과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극 중 권해효는 자신의 본명을 그대로 사용한 해효를 연기했다. 해효는 사회 격변, 혁명, 사랑이 치열하게 뒤섞였던 80년대의 기억에 머물러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 첫사랑 순이를 잊지 못해 그녀의 고향인 일본 후쿠오카 뒷골목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외로운 남자다. 순이 때문에 28년 전 연락을 끊은 후배 제문(윤제문 분)과 수상한 여자 소담(박소담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면서 함께 여행을 하게 된다.

해효로 분한 권해효는 현실 같기도 하고, 꿈 같기도 하고, 기억 같기도 한 묘한 스토리 전개 속에서 현실에 발을 붙인 탄탄한 연기로 극에 중심을 잡으며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이지만, 틀에 박히지 않은 연기로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를 완성해내 호평을 받고 있다.

권해효는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배우 활동뿐 아니라 사회적 문제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일본 내 조선학교를 돕는 비영리단체 ‘몽당연필’을 이끄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 <시사위크>와 만난 권해효는 “연기가 전부인 것처럼 살지 않았던 것이 30년 동안 버텨올 수 있었던 힘이 아니었나 싶다”며 배우로, 사회운동가로 살아온 지난 삶을 되돌아봤다. 

영화 ‘후쿠오카’(감독 장률)로 관객과 만나는 권해효. /인디스토리
영화 ‘후쿠오카’(감독 장률)로 관객과 만나는 권해효. /인디스토리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그동안 장률 감독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연락이 와서 놀랐다. 영화제에서 자주 뵙긴 했지만, 술 한 잔 깊게 나눠본 적이 없었다. 장률 감독이 표정으로 드러내는 스타일이 아니잖나. 저 양반이 나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모르겠고. 그런데 불쑥 전화가 와서 나에겐 특별한 경험이었다. 대충 내용만 들었다. 대학시절 만난 두 남자가 헤어졌고, 다시 만나는 이야기라고. 윤제문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나도 당연히 좋았다. 내가 윤제문을 좋아한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귀여운 배우라고 생각한다. 또 관객의 입장에서 보기엔 매 신마다 영화 전체의 공기를 바꿔버릴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정말 팬이다. 대학로에서 무대에 같이 서긴 했지만, 영화는 첫 작업이었기 때문에 좋았다. 촬영도 즐거웠다.”

-대략적인 이야기만 듣고, 출연을 결정한 건가.
“맞다. 어떤 작업은 내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지 이런 고민을 하면서 작품을 접할 때가 있지만, 어떤 작가와의 작업을 기대하면서 접할 때도 있다.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처음 들었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했던 것 같다.”

-영화가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을 것 같은데, 배우는 어떤 해석을 갖고 촬영에 임했나.
“나 역시 촬영하는 내내 질문한 적이 없고, 의문을 갖거나 생각해본 적이 없다. 꿈 같다거나 기억 같다거나 하는 것은 흔한 일상성의 흐름에서 비춰봤기 때문이다. 영화적으로 만들어지면 관객들이 어떻게 볼지 궁금함만 있었다. 이상하게 느끼거나 그러진 않았다. 장률 감독과 작업에서 내가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를 어떻게 쓸까에 대한 궁금함이 있었을 뿐이다. 재밌게 읽고 즐겁게 촬영했다.”

-본명을 그대로 사용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어땠나.
“되게 생경하지 않나. 내가 예능프로그램에 나가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인데, 자연인 권해효로 등장하는 게 불편할 때가 있다. 극 중에서 내 이름이 불릴 때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감독이 일부러 노리고 쓴 게 아닐까 싶었다. 해효가 아니라 철수라고 하면 느낌이 다르지 않겠나. 일상성에 가까운 듯하면서도 배우 입장에서 배역으로 자기 이름이 불릴 때 생경함 이런 것들이 둘의 대화 속에서 묘한 긴장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그런 목표 때문에 한 게 아닐까라고 생각을 해봤다. 사실 극 영화 안에서 배우의 실제 이름을 그대로 호명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선택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뭔가 수행하는 인물이잖나. 그렇다고 너 자신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생경하면서도 낯선 경험이었다.”

-실제 본인과 싱크로율은 어땠나.
“많이 다르다. 나는 심통 부리는 사람은 아니다. 하하. 또 평생 속상하거나 기분 나쁜 일로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아까운 술을 왜 그렇게 마시나. 좋은 사람하고 기분 좋을 때, 기분이 좋기 위해서 마신다. 결이 다르다. 한 가지 비슷한 게 있다면, 사람들이 내가 만날 돌아다니고 사람 만나러 다닐 것 같은데, 집 밖에 잘 안 나가는 스타일이다. 활동적인 것도 별로 안 한다. 그런 면에서 비슷하다.”

‘후쿠오카’로 호흡을 맞춘 윤제문(왼쪽)과 권해효. /인디스토리
‘후쿠오카’로 호흡을 맞춘 윤제문(왼쪽)과 권해효. /인디스토리

-실제 절친한 사이인 윤제문과의 만담 ‘케미’가 돋보였다. 두 배우가 만들어낸 장면도 있나.
“대본에 쓰여있는 그대로 한 것 같다. 보통 감독들이 자기가 구상한 장면과 이야기를 관찰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장률 감독은 그 안에서도 되게 아이 같다. 우리가 리허설을 하든 구석에서 놀고 있든, 우리끼리 뭘 하고 있으면 보면서 되게 재밌어하고 그걸 바로 영화에 녹여내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평소에 내가 제문과 하는 대화와 유사한 것도 있다. 이 영화가 어떻게 생각하면 한없이 무거워질 수 있잖나. 그런데 제문과 해효의 유치함이 영화에 좋은 긴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세월이 지나도 철들지 않은 것들…”

-박소담은 어땠나.
“처음 함께 작업했는데, 박소담이 묘한 느낌이 있잖나. 어떻게 보면 소녀 같고, 어떻게 여성스러운 느낌도 있고, 또 어떨 때 보면 중성적인 느낌도 든다. 여러 가지 색을 가진 친구인 것 같다. 나와 윤제문은 박소담의 질문이나 제안에 반응하는 정도면 되는데, 박소담은 많은 고민을 했을 거다. 스스로 규정할 수 없는 역할이잖나.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을 거다. 두 남자는 자기 스스로 몸을 일으켜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다. 박소담이 멱살 잡고 하드캐리 하는 거다. 동기부여를 해주고, 끌고 가는 사람이었다. (박소담이) 없다면 영화 끝날 때까지 제문과 해효는 각자 서점, 술집에서 계속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권해효. /인디스토리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권해효. /인디스토리

-후쿠오카에서 거의 모든 촬영이 진행됐는데.
“좋았다. 가기 전에 하나 걱정도 있었다. 24년 동안 그렇게 장시간 아내와 떨어져있었던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4일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2주 정도 떨어져있어야 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했다. 하하. 저예산 영화여서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가장 저렴한 숙소에서 각각 머물렀다. 촬영이 끝나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 밥을 해먹고 시간을 보냈다. 촬영한 시간을 제외하곤 혼자 보냈다. 좋았다. 재밌었다.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온전히 혼자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특별한 기억이 됐다. 그 영화 촬영을 마치고 얼마 후에 아이들과 다시 한 번 여행을 갔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첫 해외여행이 일본 후쿠오카였다. 그때는 맛있는 거 먹고 그랬는데, 한 도시에서 10일 넘게 매일 걷고 그 공간을 하나하나 다시 눈여겨본다는 게 일반적인 여행과는 다르더라. 그 도시에 대해 잘 알게 됐다.”

-영화와 드라마, 연극까지 꾸준히 활동해오고 있는데 작품을 택하는 기준이 있다면.
“기본적으론 시나리오다. 재밌으면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한다. 그 정도의 생각인 것 같다. 특별히 이런 건 안 해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특별한 기준이 없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다. 내가 해왔던 일과 조금 다르면 좋겠다 정도의 생각은 한다. 내가 지금까지 해오면서 후회하는 작품들이 있는데, ‘권해효를 생각하면서 썼다’고 했던 작품들이다. 30년 경험 동안 그렇게 한 작품치고 좋았던 경험이 없다. 나를 생각하며 썼다는 것은 내가 예전에 했던 걸 그대로 차용하는 형태라는 거다. 그런 건 흥미가 없다. 최근 ‘반도’(감독 연상호)에서 김노인 역할이었는데, 노인 역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재밌고 좋았다.”

-배우뿐 아니라,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배우 생활을 함에 있어 어떤 영향을 주나.
“지난 30년 간 배우로 견뎌온 스스로가 대견하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생각해 보면, 첫째 운이 좋았다. 둘째 결혼을 잘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거리두기를 해왔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일은 경쟁하지 않는 직업인데도 치열한 경쟁 속에 놓여 있다. 영화인, 연극인, 배우로서 이 안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함께 연대했던 것이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해줬다. 연기가 전부인 것처럼 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세월 지나 생각해보면 그게 나를 버티게 해준 힘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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