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전기차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오랜 세월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들어온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전기차에 집중하고, 전기차 전문기업 테슬라의 가파른 성장세가 주목을 받는다. 전기차만 생산되고, 주유소보다 충전소가 더 익숙해질 시대가 이제 멀지 않았다. 

이 같은 변화의 시대에 화려한 주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주목 받진 못해도, 중요한 제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조연도 있다. 미래지향적인 디자인과 막강한 성능, 놀라운 최신기술을 뽐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일상과 더욱 가까운 곳에서 전기차 시대를 앞당기고 있는 숨은 영웅들을 <시사위크>가 조명한다. [편집자주]

파워프라자
파워프라자가 한국GM의 라보를 전기차로 탈바꿈해 활용성을 높였다. / 파워프라자

시사위크=제갈민 기자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트럭 형태의 화물차는 보통 영업용으로 많이 쓰인다. 영업용 화물차는 일반적인 자가용 차량 대비 연간 주행거리가 많은 편이며, 차량 교체 주기도 길어 매연과 미세먼지 등 환경문제의 주범 중 하나로 꼽힌다.

이에 최근 국내 자동차업계에서는 1톤 소형 상용트럭을 전기차로 출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보다 훨씬 먼저 경·소형 상용전기차를 선보여온 곳이 있다. 이름난 자동차기업도 아닌 중소기업 파워프라자가 그 주인공이다.

◇ 전원공급장치 만들던 중소기업, 전기차에 뛰어들다

파워프라자는 1993년 산업용 전원공급장치(SMPS·파워서플라이) 개발·생산해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파워프라자는 △DC-DC 컨버터 △AC-DC 컨버터 등 700여종의 전원공급장치를 개발했다.

그러던 중 환경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로 떠오르자 2007년 ‘친환경 경영방침’을 선언하고, 그간 축적해온 전력·전자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기(EV) 파워트레인 솔루션 연구 △EV관련 부품개발 △고속 전기차 연구개발 및 생산 등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전기차 연구에 몰두한 파워프라자는 한국GM의 경상용차 ‘라보’를 도입해 차량에 장착된 내연기관 부품들을 모두 떼어냈다. 공해를 발생시킬 수 있는 내연기관 대신 배터리를 이용해 주행이 가능하도록 차량을 개조했다.

이러한 저공해 친환경 차량 연구를 거듭한 결과 8년만인 지난 2015년 국내 최초로 라보를 기반으로 한 상용전기차 ‘라보 피스(Peace)’를 완성했고,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KATRI)으로부터 국내 안전인증을 받아 상용화에 성공했다. 

라보는 2016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보급되고 있다. 이 기간 중 홀수 해에 공급량이 많게 나타났으며, 5년간 총 52대를 보급했다. / 제갈민 기자
라보는 2016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보급되고 있다. 이 기간 중 공급 첫해와 홀수 해에 공급량이 많게 나타났으며, 5년간 총 71대를 보급했다. / 제갈민 기자

◇ 라보 피스, 관공서·공원관리사무소 등 다방면 공급… 수요 ‘꾸준’

파워프라자는 2014년 11월, 서울시의 전기트럭 무상임대 시범사업에 참여해 같은 해 12월 라보 피스 4대를 인도했다. 라보 피스는 6개월간 서울시와 서울 강동구청, 우정사업본부 서울지방우정청 서울광진우체국 등에서 업무에 사용됐다. 이후 2016년부터 현재까지 관공서를 비롯한 개인사업자 등에 보급을 이어오고 있다.

2016년 8월에는 최초로 성남시청에 라보 피스 2대를 공급했다. 성남시청은 전국 공공기관을 통틀어 전기화물차를 최초로 구입한 곳이다. 비슷한 시기, 낙산공원 공원관리사업소에서 1대, 제주 대한통운에서 1대를 구입해 업무에 이용하고 있다. 이후에도 △2017년 26대 △2018년 4대 △2019년 23대 △2020년 4대 등을 공급한 파워프라자다.

특히 라보 피스를 많이 이용하는 곳은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한 서울농수산식품공사다. 2017년 6대를 도입한 후 2019년 추가로 3대를 도입했다. 또 올해 9월 25일에는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강서지사에서 1대를 더 도입해 서울농수산식품공사에서 총 10대를 운용하고 있다. 2017년 6대 보급은 관공서 기준 최대 물량 보급이다.

가락동 서울농수산식품공사는 많은 상점들이 밀집해있는 유통단지의 특성상 근거리 물류 이동이 잦고, 통행로는 좁으며, 유동인구는 많다. 라보 피스에 안성맞춤인 환경이다. 좁은 통행로를 자유자재로 오가면서도 행인들에게 매연을 뿜지 않아 업무효율과 쾌적함이란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는다. 

또한 공원과 휴양림·수목원, 대학교 캠퍼스 등에서도 이용이 늘어나고 있다. 낙산공원에서 라보 피스를 이용한 후 △솔향수목원(강원 강릉시) △성불산 자연휴양림(충북 괴산군) △팔공산 자연휴양림(경북 칠곡군) △북서울 꿈의숲·서울숲(서울시) △용산 가족공원(서울시) △광주과학기술원 △강원대학교 춘천캠퍼스 등에서 도입해 이용하고 있다. 관공서에서도 추가로 도입하는 움직임이 관측된다.

이외에도 서울시설관리공단과 양천구청·강남구청·관악구청 등에서 라보 피스를 도입해 청계천과 서울어린이대공원, 양재천, 관악산 관리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김천시청에서도 산림·공원 시설물 관리에 이용 중이다.

운송업에 종사하는 개인사업자들도 지난해부터 라보 피스를 찾는 추세다. 현재 화물차량의 영업용 번호판은 쿼터제로 인해 발급이 까다롭다. 이 때문에 일반 1톤 이하 내연기관 소형트럭을 구매해 영업용번호판을 달기 위해서는 번호판을 개인 간 거래를 통해야 한다. 영업용번호판 거래시세는 약 2,500만원에 달한다.

그러나 친환경화물차에 한해 화물차 영업용 번호판을 기존 쿼터제와 무관하게 발급받을 수 있는 ‘화물트럭 운송법’이 2019년 1월부터 개정·시행됐다. 운송업에 종사하는 사업자들에게 큰 혜택이다. 때문에 라보 피스를 찾는 이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 제갈민 기자
라보 피스는 대부분의 실내 장치들을 그대로 사용해 비용 인상을 최소화했다. 계기판도 내연기관 라보의 것을 그대로 사용해 연료게이지도 그대로 남아있다. 이 연료게이지는 배터리 잔량이 표기되도록 했다. / 제갈민 기자

◇ 스틱도 오토처럼, 작은 차이가 큰 차이 만들어

기자는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위치한 파워프라자 본사에 방문해 라보 피스를 시승했다.

라보 피스는 전반적으로 기존 라보와 내·외관이 크게 바뀐 부분은 없다. 기존 내연기관 라보를 전기차로 개조하면서 엔진과 연료탱크(가스탱크)를 탈거했고, 대신 전기모터와 리튬이온배터리를 장착했으며, 연료주입구(LPG주입구)에는 전기충전잭을 설치했다. 기존 차량에 설치된 배터리는 탈거하지 않고 함께 이용한다. 이 배터리는 헤드라이트나 와이퍼, 에어컨 등을 사용할 때 쓰인다.

실내에서는 센터페시아 하단에 모니터가 설치됐다. 이 모니터를 통해 차량의 주행가능 거리를 비롯한 상태를 체크할 수 있다. 시동을 걸기 위해 열쇠를 꽂고 돌리면 모니터가 켜지면서 ‘READY’라는 글자가 뜨고, 시동이 걸리면 ‘GO’로 바뀐다. 시동이 걸렸음에도 차량에선 진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니터가 없다면 시동이 걸린 것을 알아채기 힘들 정도다. 

변속기는 5단 수동 변속기를 채택했다. 기존의 라보가 5단 수동 모델만 출시돼, 이를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다만, 라보 피스는 브레이크 페달과 클러치 페달을 밟고 기어를 조작한 후 클러치 페달에서 발을 떼도 시동이 꺼지지 않았다.

/ 제갈민 기자
차량 내부에 설치된 모니터는 배터리 잔량 및 차량의 상태 등을 알려준다. / 제갈민 기자

파워프라자 관계자는 “변속기가 엔진 대신 전기모터와 체결돼 수동임에도 자동 변속기처럼 주행을 할 수 있다”며 “출발은 3단으로 가능하며,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3~4단을, 오르막이나 내리막 경사로에서는 1~2단을 사용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변속기를 3단에 체결한 후 가속 페달을 밟으면 차량은 부드럽게 출발한다. 울컥거림도 없다. 주행 중 정차를 할 때도 클러치 페달을 굳이 밟을 필요가 없다. 주행 중 기어 변속도 부드럽다. 3단으로는 시속 40~50km정도까지 무난하게 주행이 가능해 도심 주행에서는 굳이 변속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출발 직후나 가속 페달을 깊게 밟으며 가속을 행하면 엔진소음 대신 ‘위잉’하고 전기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다.

계기판도 기존의 것을 그대로 활용해 속도계와 연료게이지 등이 모두 남아있다. 센터페시아 하단에 설치된 모니터와 계기판이 연동돼 있으며, 배터리가 소모됨에 따라 연료게이지 바늘도 함께 내려간다. ‘연료게이지=배터리 잔량’으로 이해하면 된다. 주행가능 거리는 모니터에도 표시된다.

/ 제갈민 기자
리튬이온 배터리가 적재함 아래에 장착돼 있으며, 충전단자는 AC단상 5핀 완속 충전을 지원한다. 충전소켓은 기존 연료주입구에 위치하며, 열쇠로 열고 잠글 수 있다. / 제갈민 기자

실내 공간이 좁은 점은 라보 차량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라보를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이미 인지 및 감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는 아니다. 파워 스티어링휠도 적용되지 않았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라보 피스는 1회 완전 충전 시 주행가능 거리가 공식 인증 기준 약 72km 정도다. 배터리 잔량이 98%일 때 약 70km 주행이 가능하다고 표시됐다. 주행거리가 짧게 느껴질 수는 있으나 시설관리 또는 단거리 배송과 같은 영역에 사용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파워프라자는 현재 라보 피스 외에도 1톤 전기화물차 봉고3도 전기차로 개조해 판매를 시작했다. 다만, 국내 대형 자동차 기업에서 생산하는 1톤 전기화물차에 비해 다소 비싸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파워프라자는 현대차 스타렉스나 르노 마스터를 기반으로 한 개조 전기화물차 및 전기승용차(예쁘자나) 개발을 지속해나간다는 계획이어서 향후 성장이 기대된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