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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씨네
[소리도 없이] ‘아이러니’의 미학
2020. 10. 12 by 이영실 기자 swyeong1204@sisaweek.com
영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가 베일을 벗었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가 베일을 벗었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근면 성실하고 전문적으로 시체 수습을 하며 살아가는 태인(유아인 분)과 창복(유재명 분). 어느 날 단골이었던 범죄 조직의 실장 용석(임강성 분)에게 부탁을 받고 유괴된 11살 아이 초희(문승아 분)를 억지로 떠맡게 된다.

그러나 다음 날 다시 아이를 돌려주려던 태인과 창복 앞에 용석이 시체로 나타나고,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악의 없이, 계획에 없던 유괴범이 돼버렸다.

영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는 납치한 아이를 맡기고 죽어버린 의뢰인으로 인해 계획에도 없던 유괴범이 된 두 남자의 위태로운 범죄 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SF 단편 ‘서식지’로 호평을 받은 신예 홍의정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소리도 없이’는 독특한 캐릭터 설정과 아이러니한 사건을 통해 기존 범죄물과는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한다. 무겁고 어두운 소재를 다루지만, 평온하면서도 일상적인 톤으로 그려내 신선한 충격을 안긴다.

‘소리도 없이’로 뭉친 (위 왼쪽부터)유아인과 유재명.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소리도 없이’로 뭉친 (위 왼쪽부터)유아인과 유재명.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태인과 창복은 범죄 조직의 뒤처리를 하는 ‘청소부’라는 범상치 않은 직업을 갖고 있지만, 나름대로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며 살아간다.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태인과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며 신앙심마저 신실한 창복의 모습은 범죄에 협조하며 살아가는 이들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각자의 기준 안에서 무심한 듯 자신의 삶을 그저 성실하게 살아가는 두 캐릭터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선악의 판단을 유보한 채, 그들의 삶 그 자체에 빠져들게 만든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고 규정하기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아이러니’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재미 요소다. 무거운 소재를 다룬 범죄물임에도 일상적이고, 때로는 따뜻하기까지 한 영화의 분위기와 웃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아이러니는 이 영화만의 독특한 매력을 완성한다. ‘비극은 따뜻한 일상에서도 찾아올 수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비극적 일상에서도 따뜻함을 찾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대사 한 마디 없이도 스크린을 장악하는 유아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대사 한 마디 없이도 스크린을 장악하는 유아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유아인은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아니, 기대 이상의 활약으로 자신의 진가를 다시 한 번 증명해낸다. 범죄 조직의 소리 없는 청소부 태인으로 분한 그는 대사 한 마디 없이 스크린을 장악한다. 섬세한 표정과 세밀한 몸짓만으로 태인의 감정을 모두 표현한다. 삭발과 체중 증량 등 파격적인 외적 변화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유아인은 역시 최고의 배우다.

유재명도 좋다. 범죄 조직의 신실한 청소부 창복 역을 맡은 그는 안정적인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는다. 다만 생각보다 분량이 적어 아쉬움을 남긴다. 초희를 연기한 아역배우 문승아도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며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연출자 홍의정 감독은 “‘인간은 선과 악이 모호한 환경 속에서 각자의 생존을 위해 변화한다’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며 “누구나 살면서 선택의 순간을 강요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생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던 행동들을 떠올려 보며 스스로 위로를 해줄 수 있었으면 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러닝타임 99분, 오는 1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