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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씨네
[인터뷰] 멋지지 않아도, 대사 한 마디 없이도… 그저 ‘유아인’만으로
2020. 10. 23 by 이영실 기자 swyeong1204@sisaweek.com
배우 유아인이 영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로 돌아왔다. /UAA
배우 유아인이 영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로 돌아왔다. /UAA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볼록 나온 배에 구부정한 자세, 입이 댓 발 나온 표정까지 그동안 보지 못한 외적 변신도 새롭고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건 대사 한 마디 없이도 관객을 매료할 수 있는 그의 연기, 그의 에너지, 그의 열정이다. 영화 ‘소리도 없이’(감독 홍의정), 그리고 태인은 배우 유아인이라 가능했고, 배우 유아인이어야만 했다.

영화 ‘소리도 없이’는 납치한 아이를 맡기고 죽어버린 의뢰인으로 인해 계획에도 없던 유괴범이 된 두 남자의 위태로운 범죄 생활을 그린 작품이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SF 단편 ‘서식지’로 호평을 받은 신예 홍의정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지난 15일 개봉한 ‘소리도 없이’는 기존 범죄물과는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하며,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묵묵하게 범죄 조직의 뒤처리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태인(유아인 분)과 창복(유재명 분)이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모든 것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무겁고 어두운 소재를 평온하면서도 일상적인 톤으로 그려내 독특한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유아인이 완성한 태인은 ‘소리도 없이’만의 독특한 매력을 배가시킨다. 극 중 태인은 범죄 조직의 뒤처리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인물로, 어떤 이유 때문인지 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도 의지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태인은 어쩌다 맡은 의뢰를 통해 만난 초희(문승아 분)로 인해 변화하고, 한 걸음 나아간다.

유아인은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태인을 살아 숨 쉬게 만들었다. 먼저 체중을 15kg 증량하고, 삭발을 하는 등 초창기 시나리오 속 호리호리한 소년의 이미지였던 태인과 정반대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말은 없지만 몸을 많이 쓰는 태인에겐 압도적인 비주얼이 더 적합할 것이라는 그의 아이디어였다.

또 유아인은 대사 한 마디 없이 인물의 심리 상태와 감정 변화를 고스란히 전달해냈다. 그의 표정과 눈빛, 몸짓만으로 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유아인은 태인 그 자체였고, 관객은 유아인 그리고 태인에게 소리도 없이 빠져들었다.

매 작품 새로운 얼굴로 돌아오는 유아인. /UAA
매 작품 새로운 얼굴로 돌아오는 유아인. /UAA

지난 6월 개봉한 ‘#살아있다’에 이어 ‘소리도 없이’까지, 코로나19 시대 두 편의 영화로 관객과 만나게 된 유아인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분들께 울림을 주는 영화가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라며 진심을 전했다.

-또 한 번의 새로운 시도였다. 어땠나.
“새로운 지점에 도달하는 영화였다. 연기적으로도 새로운 도전을 요구하는 작품이기도 했었다. 그런 덕분에 이 자리에서 새로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 좋다.”

-코로나19 시대에 ‘#살아있다’에 이어 두 편이나 개봉하게 됐는데. 
“다른 의미에서 다른 방식으로 좋아해 줄 만한 작품이라고 여기고, 그런 부분들이 잘 그려질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임했던 작품이다. 그려지는 이야기는 다소 무거울 수 있고 칙칙할 수 있지만, 그걸 다뤄내는 스타일이나 그것이 지목하는 이야기들이 아주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이라고 생각되는 작품이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분들께 울림을 주는 영화가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독특한 매력이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데.
“독특한 직업이나 드라마틱한 일이 만들 수 있는 효과를 극대화하기보다, 반대로 아주 담담하게 일상적인 톤으로 심지어 코믹하게까지 그려내면서 우리에게 조금 다른 시선을 준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그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미화에서 그칠 수 있는 큰 리스크를 가진 작품인데, 그것을 견제하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사회를 고발한다든가, 그렇다고 너무 아름답고 착한 메시지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고고하지 않게 관객들과 함께 편안하게 호흡하면서 관객 스스로 저마다 메시지를 형성할 수 있게 이끌어내는 작품이라는 점이 특별한 부분이다.

과한 우아함이나 고고함 따위가 보이지 않는 점이 좋다. 전능한 신의 놀이를 하는 것 같은 감독들에게서 볼 수 없는 담담하고 따뜻한 시선, 태도가 있는 것 같다. 잘난 척하지 않는다는 거다. 선생질하지 않고 사람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가져갈 수 있게 이끌어낸다는 점이 아주 특별하다. 한국영화에서 이런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는 아주 색다른 태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양심적인 척, 착한 척하지 않고 아주 중요한 본질적인 삶의 이야기, 관계 안에서의 이야기들을 확장성을 열어둔 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홍의정 감독의 고유한 스타일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15kg 증량, 삭발 등 외적 변신을 시도한 유아인(왼쪽).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15kg 증량, 삭발 등 외적 변신을 시도한 유아인(왼쪽).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태인은 어떤 인물이었나.
“보통은 (캐릭터에) 연민을 통해 접근한다. 잘나가든 못나가든 환경이 어떻든 인간으로서 삶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자들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연민, 그 무거움을 통해 인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공감대를 형성해서 내 안에서 그 인물을 깨어내는 것으로 작업에 임하는 편이다. (태인에게도) 그런 접근이 있긴 했지만, 어떤 판단보다 호기심을 더 크게 갖고 접근했던 것 같다. 그래서 촬영 전까지 어떠한 형태의 답도 갖지 않은 상태로 임했다. 촬영에 들어가서 조금씩 감을 잡아가는 형태로 했다. 이런 느낌에 더 가깝겠구나, 이런 상태이겠구나 혹은 그냥 하는 거지 별 감정의 상태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가갔다.

이런 위험한 일을 하는 친구를 너무 큰 연민으로 다가가는 건 그다지 달갑지 않은 부정적인 미화의 위험이 있다. 아무리 악한 인물이라도 내가 이해도를 갖고 공감한 상태로 그 인물을 표현하면 그것이 미화가 되는데, 이 인물은 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접근한, 쉽게 판단하기를 완전히 보류한 상태에서 접근한, 궁금증과 호기심 그 자체를 끌어안고 접근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윤리적으로 큰 결함을 가진 인물이다. 직업적으로도 그렇다. 당장 마주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하고 이어간다는 점에서 지탄을 받으려면 받을 수도 있는 인물이지만, 결국엔 표면적 이유들로 우리가 누군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의구심을 만들어내야 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판단보다 호기심, 확장성에 더 집중하면서 접근했다.“

-태인 캐릭터에 있어서 본인의 아이디어가 더해진 부분이 있다면.
“별건 아니지만, 캐릭터의 외형을 잡아가는 것에 있어 많은 제안을 했다. (홍의정 감독이) 흥미로워했고 수용해 줬다. 전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서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는 표현은 아닐 수 있는데, 그것이 만들어내는 의외성을 보다 더 흥미로워해 주는 걸 보면서 같이 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 생각들도 하게 됐다. 나중에 살이 조금 빠질 것 같으면 (홍의정 감독이) 아쉬워하기도 했다. (태인에 대해) 명확한 설정이 있지는 않았지만, (초기 설정은) 마르고 초췌하고 마이너함의 전형성을 그대로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삭발도 제법 잘 어울릴 것 같고 신선한 느낌이 있을 것 같아 하게 됐다.” 

대사 한 마디 없이 관객을 매료한 유아인. /UAA
대사 한 마디 없이 관객을 매료한 유아인. /UAA

-대사 없는 캐릭터였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표정이나 몸짓으로 표현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표정, 상황에서 말을 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생성되는 몸의 움직임, 같은 것들을 자연스럽게 표출하고 수정하면서 다듬어갔던 것 같다. 나도 ‘내가 이런 몸의 움직임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할 정도로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게 귀엽던데? 하하. 사람이 순수해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말이라는 것은 잘할수록, 노련해질수록 사람이 조금 징그러워지잖나. 태인은 표현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에 표현하지 않기를 선택한 인물이라고 나는 느끼고 있는데, 그런 인물이 굳이 몸으로도 표현하고 싶지 않겠지만, 반대 의사를 내비친다거나 저항감을 내비칠 때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되는 표현들이 그냥 귀엽더라.”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 나온 순간은 없었나.
“없었다. 오히려 내가 미세한 소리조차 안 낼 정도로 너무 차단을 하고 있어서, (홍의정 감독이) ‘억, 악’ 이 정도 소리는 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말을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후반 작업하면서 추가한 소리들도 있다. 두드러지진 않지만 미세하게 미묘하게 튀어나오는 작은 소리들. 배우로서 어떤 촌스러운 욕심에 비춰보자면, 말을 못하니까 안 나오는 걸 답답해하고, 표현하고 싶고 하지만 할 수 없어서 터져 나오는, 폭발하는 감정을 한 번쯤 연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사실 그것과도 다른 형태를 요구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 할 정도로 어떤 강박에 시달리던 순간들도 있었다.

표현이 절제될수록 관객들이 느끼는 느낌 안에서 더 폭넓게 깨어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강렬한 표현을 통해 우리가 압도적인 느낌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여백을 채우기 위해 나타나는 정서들이 있고, 결국엔 그것이 관객에게 조금 더 권력을 내어주는 작품의 태도, 이 인물의 태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임했던 것 같다. 어떤 작품들을 볼 때 너무 강렬하고 좋고 인상에 남지만, 뭐랄까 폭행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다른 여지는 없는 것 같이 아주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어떤 전능한 자의 시간의 종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작품들도 있는데, 그런 작품들과 결을 달리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15kg나 증량했다. 스크린으로 보니 생각보다 더 묵직하더라.
“배 보니까 참 좋더라. 하하. 유아인이 기존에 그려왔던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주는 임팩트가 존재했을 거다. 비교적 예쁘고 말간 얼굴만 그려온 건 아니지만, 이 정도까지 극단적인 변화를 준 적은 없었는데 그것 자체가 만들어내는 영화적인 효과 같은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그 정도로 위압감을 주는 임팩트는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크게 봐주시는 것 같아서 안도감이 들었다. 감독님도 조금 더 크기를 요구하기도 하셨다. 명확하게 확실한 변화를 그려내야 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잘 전달됐다면 굉장히 감사하다.

그런 식의 플레이들도 연기라는 반경 안에 들어온 것 같다. 어떤 인물을 깨끗하게 순수하게 내 입장에서 내 태도로 연기한다의 문제가 아니고, 결국에는 관객 여러분과 내가 작품을 통해 함께 형성하고 있는 이미지들 혹은 작품 외적으로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이미지 게임 같은 것들의 연장선에서 연기를 대하게 되는 다른 입장도 생겨나는 것 같다. 순도 있는 연기, 진정성 있는 연기만으로 되지 않는 지점들이 생겨나는 거다.

너무 많이 팔리고 소비됐으니까, 내 본질을 떠나 하나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배우로 봤을 때 상당히 다양한 색이 묻어있고, 오염이 됐다면 오염이 됐을 수 있고, 많이 소비됐다면 소비됐을 수도 있는 이미지니까 조금 다른 변화들을 시도하게 하는 의지 같은 것들이 그런 곳에서도 출발한 것 같다. 나의 순수함, 나의 진정성만으로는 되지 않는 게임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 거다. 탈색도 해보고, 살도 찌워보고 가발도 써보고. 그게 전부가 될 순 없겠지만, 모든 연기의 출발점이잖나.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도 점점 더 깊어지는 것 같다.”

유아인이 또, 성장했다. /UAA /UAA
유아인이 또, 성장했다. /UAA /UAA

-살이 찜으로써 걸음걸이나 몸짓 등도 자연스럽게 변했을 것 같은데.
“일단 입술에도 살이 찌고, 코에도 눈두덩이에도 살이 찌더라. 야식을 너무 많이 먹으니까 붓기인지 살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했다. 이게 나의 살이다, 몸이다를 떠나 시각적 장치들이니 잘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예전에는 인물에 맞는 태도나 자세, 걸음걸이에 대한 의지 의식이 많이 반영됐던 편인데, 이번에는 살을 찌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몸의 태도를 있는 그대로 녹여내려고 노력했다.

몸을 망가뜨리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에, 망가져가는 몸의 태도 같은 것들 구부정하고 걸을 때 보면 엉덩이가 이상하게 튀어나와 있고, 이상한 S라인이 자연스럽게 그려졌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다. 살을 드러내고 싶은 의지도 있었다. 조금 짧은 바지를 선택한다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 몸이 조금 노출되기도 했다. 홍의정 감독이 어려워하기도 했는데, 내가 그냥 마음껏 쓰시라고 했다. 몸의 노출에 대한 배려하지 말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쓰시라고 했다.”

-항상 관리를 해야 하는 입장인데, 증량하는 과정이 자유롭기도 했을 것 같다.
“전혀 아니다. 입이 굉장히 짧아 다 먹는 게 너무 힘들었다. 간장게장과 먹지 않으면, 밥을 반 공기 밖에 안 먹는다. 주어진 걸 절대로 다 먹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오다 다 먹어야 살이 찌니까 힘들었다. 식빵 열 개를 믹서기에 우유랑 넣고 갈아서 마시고, 닭 가슴살도 갈아먹었다. 씹는 것도 힘드니까… 그런 과정들이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살이 빠질 줄 알았는데, 습관이 돼있으니 확 줄이기 힘들더라. 근데 또 금방 위가 줄어들었다.”

유아인이 홍의정 감독을 향한 믿음을 드러냈다. /UAA
유아인이 홍의정 감독을 향한 믿음을 드러냈다. /UAA

-제작보고회나 기자간담회에서 홍의정 감독에 대한 강한 애정이 느껴졌는데. 
“다분히 전략적이었다.(웃음) 하지만 아주 강한 애정에 기반한다. 희망을 걸어도 좋을 만한 감독님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작은 힘이라도 실어드리면 더 큰일을 해내실 수 있는 감독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작품 같은 경우, 감독님을 앞장세우고 뒤로 빠져있는 게 너무 편하다. 그게 자연스럽고, 그럴만한 사람이고 그렇게 해도 되는 사람이니까… 내가 ‘전략적’이라거나 ‘홍의정 브랜딩한다’라든가 장난삼아 얘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나쁘게 써먹지 않을 것 같은 기대감을 주는 감독이다. 최근 감독님과 통화하면서 ‘영화라는 것이 포함하는 요소들 전반에 걸쳐 감독님의 힘이 작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상태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순간이 되면 어떤 걸 보여줄지 기대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도장을 찍어뒀으니 나를 버리지 말라’는 그런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놀 수 있는 사람이라 좋다. 계속 그렇게 같이 놀고 싶은 감독님이다.”

-현장에서 감독의 칭찬을 받았던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홍의정 감독이) 원래 미소를 짓는 정도의 리액션밖에 하지 않는다. 태인이 초희를 구하러 가기 전에 정장을 입으면서 각오를 하는데, 그 상징적인 장면을 숙제처럼 내줬다. ‘이런 느낌이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한 번 해보라’고 주문을 줬다. 그 장면을 하고 나서 감독님이 만족스러워했다. 현장에서 내색하는 분은 아니었다. 한 번은 통화하면서 감독님이 ‘자기가 상상했던 태인은 이게 아니다. 하지만 너무 재밌고 좋았다’고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기분이 좋았다.”

-다양한 작품을 했지만, 삶과 맞닿아있는 이야기를 주로 택해온 것 같다.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본인에게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이 나에게 존재하는 가치, 내가 조금 더 집중하는 가치인 것이지 그것을 다른 가치들과 나란히 하고 상대적으로 무엇이 더 우월하다고 할 순 없다. 배우가 관객들과 형성할 수 있는 관계들이 아주 다양해져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적으로도 그렇고, 작품 외적으로도 그렇고. 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땐 배우가 이렇게 환대를 받는 세상에서 배우가 추구해야 할 본질, 책임감이라는 것은 삶의 이야기를 보다 더 가깝게 펼쳐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엇이든 다 삶의 이야기다. 그게 어느 정도 가공되느냐, 얼마나 드라마틱 해지느냐 어떤 톤으로 잡아내느냐의 문제겠지만, 가증스럽고 허튼소리들은 최대한 지양하는 작품들에 대한 끌림이 확실히 더 강한 것 같다.”

-‘소리도 없이’를 통해 얻은 수확이 있다면.
“실질적으로 얻게 되는 것보다 체험을 중시한다. 말로 표현하기도 쉽지 않고 증거를 남기기도 어려운 것이지만, 일상 속에서 삶 속에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내 몸의 질서가 새롭게 잡힌 것 같은 체험이 쉬운 일이 아니고 그런 경험을 했을 때 재밌다, 인생이 살 만한 것이구나 생각한다. 이 작품을 하면서 한 번도 가져가지 못했던 내면의 상태, 몸의 상태, 정신적인 상태를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 큰 경험이었다. 앞으로 그 체험의 결과가 잘 다듬어져서 내 삶에서 어떻게 무기로 쓰일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아주 조금 미세하게 한 발 더 나아간 것 같은 자유로운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가장 큰 수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