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못 쓰게 되어 내다 버릴 물건이나, 내다 버린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명시된 ‘쓰레기’의 정의다. 하지만 우리가 ‘쓰레기’로 낙인찍어 내다 버리는 것들 중에는 ‘쓸모가 여전한’ 것들이 적지 않다. 실제 그렇게 버려진 쓰레기는 새로운 자원이 되거나 에너지로 재탄생해 새 생명을 얻기도 한다. 지구를 병들게 하는 원흉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지구를 구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쓰레기의 역설’인 셈이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변화를 만들기 위해 실천하는 다양한 사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환경오염원 감소를 위한 해법과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서울환경연합에서 운영하는 플라스틱 방앗간에 색깔별로 HDPE재질의 플라스틱 병뚜껑이 분류 돼 있다. / 범찬희 기자
서울환경연합에서 운영하는 플라스틱 방앗간에 색깔별로 HDPE재질의 플라스틱 병뚜껑이 분류 돼 있다. / 범찬희 기자

시사위크=범찬희 기자  더 이상 노인들의 쉼터가 아닌 ‘패피’들이 우글거리는 핫플레이스로 자리매김한 서울 동묘 인근에는 이색 ‘방앗간’이 자리하고 있다. 이름하여 플라스틱 방앗간. 명명백백하게 방앗간을 표방하고 있는 이 곳은 흔히 알고 있는 방앗간과 분명한 차이점을 두고 있다. 곡물이 아닌 병뚜껑을 원재료로 삼고 있으며, 찜기가 아닌 사출기로 제품을 뽑아낸다. 원재료가 다르니 결과물이 다른 게 당연지사. 플라스틱 방앗간의 최종 종착점은 떡이 아닌 치약짜개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친환경 이슈의 중심에 서고 있는 플라스틱 방앗간은 업사이클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노동의 현장 그 자체였다.

◇ 분류장에서 버림 받는 병뚜껑… 치약짜개로 환골탈태

플라스틱 방앗간의 또 다른 특징은 입지에 있다. 동네 터줏대감들도 존재를 알기 힘들 것 같은 주택가 한복판 원룸 건물 지하에 공장 겸 사무실이 차려져 있다. 입동을 목전에 두고 찾은 플라스틱 방앗간은 복수의 사회적 기업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독특한 구조를 띄고 있었는데, 바로 업사이클 1세대로 불리는 ‘터치포굿’과의 인연으로 한 지붕 아래 모이게 됐다.

플라스틱 방앗간이 보통의 방앗간과 다른 결정적 차이 하나. 플라스틱 방앗간은 운동화와 맨투맨 차림의 MZ세대가 주역이 돼 운영되고 있다.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서울환경연합 소속의 활동가들은 물론, 아르바이트생과 자원봉사자들도 20대 젊은이들이다. 아직 세월의 흔적인 굳은살이 박여있지 않을 이들의 손에 의해 쓰레기인 병뚜껑이 일생활에 유용한 치약짜개로 환골탈태 되는 마법이 이뤄지고 있다.

플라스틱 방앗간에서 '참새클럽'이 보내온 플라스틱 택배를 자원봉사자들이 분류하고(좌) 사출기를 통해 녹여낸 플라스틱을 치약짜개로 가공하고 있는 모습. / 범찬희 기자
플라스틱 방앗간에서 '참새클럽'이 보내온 플라스틱 택배를 자원봉사자들이 분류하고(좌) 사출기를 통해 녹여낸 플라스틱을 치약짜개로 가공하고 있는 모습. / 범찬희 기자

플라스틱 방앗간의 활동 모델인 ‘플라스틱을 녹여 업사이클한다’는 아이디어는 네덜란드 디자이너가 개발한 친환경 캠페인(프레셔스 플라스틱)에서 차용됐다. 이동이 서울환경연합 홍보팀장과 함께 플라스틱 방앗간을 운영하는 김자연 매니저가 이집트 유학 시절 관련 활동을 접하게 된 게 시초다. 이 팀장은 “업사이클의 핵심 기계인 사출기 도면에서부터 비즈니스툴, 디지인소스 등 전반적인 내용이 프레셔스 플라스틱 홈페이지에 오픈 소스로 공개 돼 있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격식을 차리지 않고 반말을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두 활동가는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고 있는 막역한 사이다.

플라스틱 병뚜껑이 치약짜개로 변신하는 과정은 4단계를 거친다. 일명 ‘참새클럽’으로 이름 지어진 참가자들이 보내온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집’한 후 재질별, 색깔별로 ‘분류’하는 과정을 거친다. 재질별 분류는 크게 PP(폴리프로필렌)와 HDPE(고밀도 폴리에틸렌)로 나뉜다. 플라스틱 방앗간의 핵심 원재료인 플라스틱 병뚜껑의 대부분이 HDPE 재질이다. 플라스틱 방앗간이 HDPE 수집에 주안을 두고 있는 건 병뚜껑과 같은 작은 플라스틱은 선별이 어려워 재활용 선별장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팀장은 “간혹 취급 품목이 아닌 PET병이나 마우스 등을 보내오시는 분들도 있는데 대부분이 목적에 맞게 보내주고 계신다”고 말했다.

플라스틱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는 서울환경연합 이동이 미디어홍보팀장(좌)과 김자연 프로젝트 매니저. / 범찬희 기자
플라스틱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는 서울환경연합 이동이 미디어홍보팀장(좌)과 김자연 프로젝트 매니저. / 범찬희 기자

다음으로 분류 된 병뚜껑은 ‘분쇄’기에 보내져 잘게 조각 된다. 분쇄 된 플라스틱들은 마지막 과정인 ‘가공’ 단계로 넘어가 녹여진 뒤 사출기에서 치약짜개로 찍혀 나온다. 액체상태의 밀가루 반죽이 고체인 붕어빵으로 굳어지는 과정과 흡사하다. 사출기 대신 압출기나 압착기를 이용해 시트와 같은 다른 형태로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이 팀장은 시제품으로 보이는 방앗간 한켠에 쌓인 플라스틱 시트를 가리키며 “(시트를 활용해)의자 등 유용한 물품을 만들 수 있는 방안을 고안 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곳에서는 치약짜개 외에도 이벤트성으로 PP를 재료로 삼아 카라비너도 제작되고 있다.

플라스틱 병뚜껑을 원재료로 삼아 수집, 분류, 분쇄, 가공 4단계를 거쳐 최종 완성된 치약짜개. / 범찬희 기자
플라스틱 병뚜껑을 원재료로 삼아 수집, 분류, 분쇄, 가공 4단계를 거쳐 최종 완성된 치약짜개. / 범찬희 기자

지난 7월 참새클럽 1기를 모집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플라스틱 방앗간은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정착하고 있다. 지난 9월에 2,000명을 모집했던 2기 모집이 5시간 만에 마감됐다. 2차 수거가 이뤄지고 있는 현재에 이미 380kg(4일 기준)의 플라스틱이 모여 1기 수거분(256kg)을 넘어섰다. 앞으로는 개인 단위가 아닌 단체(둥지클럽) 모집도 이뤄질 예정이다. 학교나 직장 등에서 플라스틱을 모아 방앗간으로 보내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한 베타테스터 모집에 총 280팀이 참가 의사를 밝혀 35개팀을 추렸다.

작업량이 늘어나면서 방앗간은 피치 못해 이전을 앞두고 있다. 이 팀장은 “며칠 전 충무로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서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면서 “접근성이 좀 더 좋아져 외부에서 방앗간을 찾는 데 수고로움을 덜 수 있을 것 같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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