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대중은 ‘이정은’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신뢰를 보낸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이제 대중은 ‘이정은’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신뢰를 보낸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종횡무진하고 있는 배우 이정은은 달라진 입지에도 초심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들뜨지 않기 위해 더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주어진 몫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대중은 ‘이정은’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신뢰를 보낸다. 

1991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데뷔한 이정은은 2018년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알린 뒤, 드라마 ‘눈이 부시게’ ‘타인은 지옥이다’ ‘동백꽃 필 무렵’ 등에서 울림 있는 연기는 물론, 미스터리한 분위기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신스틸러’로 활약했다.

또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미국 아카데미까지 휩쓴 ‘기생충’에서 박 사장(이선균 분)네 입주 가사도우미 문광 역을 맡아 전 세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쥐며 ‘대세’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한 번 다녀왔습니다’로 주말드라마까지 섭렵, ‘열 일’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 세진(노정의 분)과 삶의 벼랑 끝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현수(김혜수 분),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이정은 분)까지 살아남기 위한 그들 각자의 선택을 그린 이야기.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섬마을 주민 순천댁으로 분한 이정은 미스터리한 분위기로 극에 긴장감을 더하는 것은 물론, 목소리 없이 몸짓과 표정만으로 모든 감정을 전달하며 묵직한 울림을 안긴다.

스크린 속 이정은은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분한 인물 그 자체로 그저 존재한다. 일부러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지도, 목소리가 없는 캐릭터에 작위적인 설정을 더하지도, 억지로 감동을 요구하지도 않고 순천댁이란 옷을 입고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삶을 살아낸다. 그의 눈빛이, 그의 숨소리가, 그가 힘겹게 뱉어낸 한마디가 유독 가슴을 흔드는 이유다.

‘내가 죽던 날’에서 순천댁 그 자체로 분한 이정은.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내가 죽던 날’에서 순천댁 그 자체로 분한 이정은.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내가 죽던 날’ 개봉에 앞서 <시사위크>와 만난 이정은은 “순천댁을 실제로 만나면 말벗이라도 해주고 싶다”며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 눈길을 끌었다.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작품을 택한 이유는.
“시나리오 기획 단계부터 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의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고, 기회가 되면 같이 힘을 실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받았다. 김혜수 씨가 주인공으로 결정됐는데, 이 시나리오 속 역할과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좋은 배우와 같이 하는 것만큼 즐거운 작업은 없지 않나. 그래서 함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정은이 등장하면 뭔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긴장감을 유지하는 역할도 해내야 했는데, 어떤 고민을 했나.
“대부분의 장면을 표정 없이 과하지 않게 가려고 노력했다. 찍으면서도 계속 (박지완)감독에게 더 평범했으면 좋겠다, 바닷가에 사는 여인 같은, 얼굴에 주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내 얼굴로 그렇게 안 되더라.(웃음) 나보다 더 좋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게 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열심히 하려고 했다. (순천댁을 보며) 뭔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실 것 같긴 했다. 사실 크게 뭐가 있는 건 아닌데, 드러나지 않게 일상성에서 벗어나지 않게 반응하는 것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인물이었는데, 어렵지 않았나.
“특별히 신경 썼다기보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으려고 했다. 내가 뭔가 숨기고 있는 입장이니 현수가 도착했을 때 두려웠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해야 하니까, 그런 점에서 잘 듣고 반응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박지완 감독이 많이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다. 나도 동의했다. 어떤 역할은 힘을 줘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감독이 힘을 빼게 해줬다. 새롭게 보이는 표정들을 모니터하면서 조율해나갔다.”

매 작품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이정은.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매 작품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이정은.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순천댁은 어떤 인물로 봤나.
“나도 그런 생각을 해봤다. 조카가 한 명 있는데 머리도 똑똑하고 집안의 자랑이다. 그런데 만약 나의 오빠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결국 내가 돌봐야 하는 일이 생기잖나. 그럴 때 내 삶이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인가, 아닌가. 내 연배 정도 되니 괜찮게 산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앞으로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불행은 나보다 더 큰 시련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천댁은) 조카를 돌보고 그런 일상이 그냥 삶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분이 있으면 말벗이라도 해드리고 싶다. 동네에서 사람을 너무 접촉 안 하니까.”

-필체 연습도 했다고. 왼손잡이라는 설정은 시나리오에 있었던 건가.
“없었다. 내가 오른손잡이인데 오른손으로 쓰다 보니 시골 어머니스러운 느낌의 필체가 안 나오더라. 그래서 왼손으로 써보면 어떻겠냐고 감독에게 제안을 했고, 계속 연습을 하니까 (순천댁의 글씨체가) 나왔다. 감독이 좋아했다. 그런데 연습하니까 괜찮더라. 앞으로 양손을 다 써볼까 봐. 하하.”

-순천댁을 연기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있다면.
“말을 하게 됐을 때. 농약을 마셨다고 하는데, 소리가 나오는 순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감독도 나도 고민이 제일 많이 됐고, 후시녹음에서도 염두에 두고 했다. 어떤 의사가 나와서 ‘그런 소리 안 냅니다’라고 하면 게임 끝인데,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도 그 부분에 끝까지 관심을 갖고 물고 늘어줘서 결과가 좋지 않았나 싶다. 녹음실에 갇혀 있다 보면 뛰쳐 가고 싶고, 마음대로 안 되는데 (감독이) 굉장히 침착하게 오랫동안 기다려줬다.”

-“네가 널 구해야지. 인생이 생각보다 훨씬 길어”라는 순천댁의 대사가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였다. 어떤 마음으로 연기했나.
“내가 배우로서 위기를 느꼈을 때가 있는데 몸이 많이 아팠다. 그때 배우를 접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때 치료해 주던 한의사가 순천댁의 대사처럼 ‘인생 긴데, 잘 조리하면 또 할 수 있지 않겠냐’고 했다. 큰 위로를 받았다. 나는 항상 혼자 낑낑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더라. 그 말을 잘 새겨듣지 않았다면 낙담하고 우울감에 빠졌을 거다. 나를 우울감에서 건져줬던 말이 이 시나리오에 쓰여있는 걸 보고 사람들이 다 비슷한 걸 고민하는구나 싶었다. 인생 짧다고 하지만 살아보면 생각보다 길지 않나. 낙담했던 순간도 지나는 순간이 있는 거고. 그 대사가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절대 빼지 말자고 했었다.”

-박지완 감독이 신인 감독이었는데, 어땠나.
“되게 마르고 그래서 체력도 나보다 못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무 가늘잖나. 하하. 그런데 확실히 이렇게 글을 쓴 사람이 갖고 있는 집요함과 느린 것 같지만 침착함, 강인함이 있는 것 같다. 다음 작품이 기대가 된다. 언론시사회 끝나고 나서 ‘빨리 작품 준비하세요’라고 했다. 어려워지고 있지만, 영화는 계속될 거라고 생각한다. 좋은 창작자가 나왔다고 생각하고, 남들이 건드리지 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감독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박지완 감독의 이력도 되게 재밌다. 영화사 마케터 출신이다. 일을 하면서 영화를 늘 꿈꿨는데, 그 꿈을 이룬 것 같아서 좋다.”

-김혜수가 순천댁의 얼굴만 봐도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함께 호흡하며 어떤 감정을 나눴나.
“결정해놓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물처럼 흘러가는 경우가 있잖나. 서로 액션과 리액션이 좋았다고 생각이 든다. 그런데 드라마틱한 순간이 좋은 것도 있지만, 그걸 담담하게 담아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게 너무 좋은 것 같다. 젊었을 때부터 혜수 씨도 나의 작업물을 보게 되는 계기가 있었고, 나도 혜수 씨가 영화에서 걸어온 행보에 대해 늘 관심이 많았다. (배우로서) 얼굴이 점점 좋아지는 것 같고, 현장에서 만났을 때 더 좋아졌다고 느꼈다. 그런 상태에서 만나니 시너지가 더 좋고, 격려하는 마음이 있으니 힘이 많이 된 것 같다.

혜수 씨와 시시콜콜 얘기하진 않는데 그냥 그 얼굴이 다 있으니까 교감들이 오고 가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김혜수가) 주변 배우들에게 참 잘한다. 좋은 배우를 추천하고 응원하고 모르는 배우한테 커피차를 보내기도 한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요정이다. 천사 같다. 같이 공감하는 배우들에 대한 격려이고 독려인 것 같다. 여유가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큰 걸 먼저 겪은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에 대한 베풂이라고 생각한다. 품이 크다. 멋있는 것 같다. 부자라서 나오는 게 아니다.(웃음) 단순한 배우라고 하기엔 큰 사람이다.”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입체적인 캐릭터를 완성해내는 이정은.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입체적인 캐릭터를 완성해내는 이정은. /워너브러더스코리아

-김혜수도 이정은을 향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혜수뿐 아니라 함께 작업한 사람들 대부분이 이정은의 매력에 빠지더라.
“글쎄.(웃음) 어쨌든 내가 현장에 가면 우리 팀 모두가 행복하게 찍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체력 안배를 잘해야 하는 이유가 이 안에서 가장 높은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감독들이 참 불쌍하다. 배우야 여러 작품을 돌아가면서 하지만, 한 작품을 내놓으려면 몇 년의 수정 작업이 필요한데, 그 안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연기하는 순간과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인데 혜수 씨가 그런 부분을 좋게 봐준 것 같다. 그런데 이건 나만 그러는 건 아니다. 만약에 좋게 보신다면 내가 좋아했던 선배들이 했던 걸 내가 그대로 해온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술을 또 잘 먹는다. 하하.”

-최근 충무로에 여성들이 함께하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변화를 체감하나.
“여성감독들이 나오게 되면 주위에 있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이 갈 것이고, 전형적으로 쓰인 여성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러면 나 같은 조연들은 할 일이 더 많아질 것이고 그 겹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으니까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할리우드도 그런 시스템으로 가고 있다. 물론 투자를 원활하게 받는 건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그것까지 원활해진다면 정말 좋은 영화 세상이 올 거다. 나는 이 시기에 (여성감독의) 영화가 쏟아질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박지완 감독이 입봉하는 동료 여성감독들이 많다고 하더라. 찍고 있을 동안에는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 때 자기 스스로 감정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감정을 찾아가고, 누군가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공감능력을 발휘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딱히 여성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보니 여성스태프들이 되게 많았더라.”

-그 중심에서 전형적이지 않은, 여배우에게 잘 주어지지 않는 캐릭터를 많이 했다. 제안도 많이 오겠지만, ‘이정은화’되면서 더 입체적인 캐릭터로 살아난 것 같은데.
“시나리오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내게 그런 역할이 주어진 것 같다. 내가 두각을 나타내게 됐을 때 이미 시나리오의 겹들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 시기에 내가 딱 활동을 하게 된 것 같다. (김)선영 씨도 겹이 달라지는 느낌이 있다. 그게 점점 더 다양화될 것 같다. 대본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시나리오에서 어떻게 인물의 겹을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한 것 같고, 그게 옛날보다는 확실히 전형적이지 않다. 도움이 많이 됐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내가 내 감정을 쓰고 내 몸을 쓰는 거니까 ‘이정은’스러울 거다. 예를 들어 ‘미성년’에서 주사를 부리는 사람이 남자였다면 여자로 대체했을 때 능청스러움을 누가 했을까 했을 때, 내가 갖고 있는 유쾌함이 잘 이용된 것 같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아무 사건 없이 평범한 역할도 더 많이 해봐야하지 않을까 숙제가 안겨지기도 한다.”

-영화 ‘기생충’을 통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큰 상도 받았다. 당시 ‘겁이 났다. 마음이 자만할까 싶었다’고 했는데, 그 후 2년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어떻게 마음을 다잡았나.
“자만은 안 했더라.(웃음) 일상으로 잘 돌아올 수 있었다. 금쪽같은 행운의 시간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 시간이 있었던 만큼 남에게 베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작품이 계속 연타로 좋을 순 없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낙담하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격려를 많이 받았다. ‘이제 좀 놀아’라는 말도 듣고, ‘그런 마음도 이해간다’면서 이미 겪으신 선배들이 측은하게 봐주시기도 했다. 늦게 성장하다 보니 들뜨고 그렇진 않을 거라고 이야기도 해주셨다. 그때 (조)여정 씨하고도 얘기를 많이 했다. 여정 씨도 침착하게 하는 편이라, 둘 다 그런 성격이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여정 씨도 드라마 계속 들어가고, 나도 계속 일하면서 그렇게 보냈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뭔가 사연이 있고, 어두운 그늘에 가려져있는 분들만 볼 영화는 절대 아니다. 하하. 김혜수의 색다른 모습, 이정은이 말을 안 하면 어떻게 보일까, 그리고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에 나왔던 꼬마 배우(노정의)가 스크린에선 어떻게 보일까 궁금함을 갖고 오셔도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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