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하는 모든 순간, 깊은 인상을 남기는 배우 김선영. /리틀빅픽처스
등장하는 모든 순간, 깊은 인상을 남기는 배우 김선영. /리틀빅픽처스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연극 무대에서 내공을 쌓은 뒤 뒤늦게 매체로 활동 반경을 넓힌 배우 김선영은 주로 중심에 서서 작품을 이끄는 주연보다, 감초 연기로 극의 재미를 더하는 조연으로 활약해왔다. 하지만 항상 존재감은 그 이상이었다. 아무리 잠깐의 등장이라도 아무리 짧은 대사더라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고, 때로는 유쾌한 웃음을 때로는 깊은 감동을 안기며 대중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이는 작품 안에 들어가 그 인물 자체로 살아 숨 쉬고자 하는 김선영의 ‘진정성’ 덕이다. 그 어떤 것도 허투루 하지 않고, 매 장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그의 ‘열정’과 ‘노력’이 더해진 값진 결과물이기도 하다. 주연으로 나선 영화 ‘세자매’(감독 이승원)에서도 김선영의 ‘진짜연기’를 볼 수 있다. 등장하는 모든 순간, 숨을 죽이고 집중하게 만드는 ‘마법’을 이번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부린다.

‘세자매’는 겉으로는 전혀 문제없어 보이는 가식덩어리, 소심덩어리, 골칫덩어리인 세 자매가 말할 수 없었던 기억의 매듭을 풀며 폭발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이다. 김선영과 문소리‧장윤주가 세 자매로 호흡을 맞췄고, 김선영의 남편이자 영화 ‘소통과 거짓말’ ‘해피뻐스데이’를 연출한 이승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극 중 김선영은 괜찮은 척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가는 희숙으로 열연을 펼쳤다. 희숙은 항상 ‘미안하다’ ‘괜찮다’는 말로 아픔을 속으로 삼키며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버릇없는 딸과 가정에 무관심한 남편에게도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못한다.

김선영은 섬세하고 디테일한 연기로 희숙을 완성해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소박하지만 단정한 차림새부터 삶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표정, 습관적으로 웃음이 섞여있는 말투까지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입체적인 인물을 완성해냈다.

영화 ‘세자매’(감독 이승원)로 관객 앞에 서는 김선영. /리틀빅픽처스
영화 ‘세자매’(감독 이승원)로 관객 앞에 서는 김선영. /리틀빅픽처스

최근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화상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김선영의 솔직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희숙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는 그가 ‘세자매’ 그리고 희숙이라는 인물에 얼마나 진심을 다해 임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완성된 작품 보고 많이 울었다고.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기술시사회 때 처음 봤는데, 나는 의외로 둘째 미연에게 꽂혔다. 가정사도 있고, 언니와 동생도 그렇고 짊어지고 가야 하는 무게가 너무 버거워 보였다. 우리 모두 늘 버거운 삶을 살잖나. 어느 순간 미연에게 감정 이입이 확 돼서 그를 중심으로 영화를 봤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 그래서 되게 많이 울었다.”

-희숙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구축해나갔나.
“어떤 캐릭터를 맡든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있을지 어떻게 걷고 어떤 머리를 하고 있을지 등 외적인 부분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돌아다니기도 하고 혼자 생각하기도 하고 주변 인물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주관적으로 직관적으로 매칭이 되면 그 인물이 그려진다. 46년 동안 살아오면서 만났던 친구, 선배 그 밖의 모든 사람들로 쌓인 김선영 만의 데이터 안에서 조합을 하고, 현재 보이는 사람들에게서도 영감을 받아 룩이 완성된다. 희숙의 룩을 구축할 때는 내가 어렸을 때 영덕에서 20년 정도 살았는데, 그 당시 가끔 영덕의 작은 시장에 가면 보게 되는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서울에서 이사 와서 영덕에 사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주머니, 쓸쓸해 보이기도 했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세 자매가 각자 삶의 방식이 다르고, 대처하는 방법도 달랐다. 희숙은 자해를 하기도 했는데, 그가 힘듦을 대처하는 자세에 대해 어떻게 공감하고 연기했나.
“도피, 회피 그리고 부인인 것 같다. 힘든데, 힘든 것을 직시하지 못하고 일상화돼있는 사람에겐 무감정의 상태가 있다고 하지 않나. 희숙은 힘든지도 모르고, 본능적으로 웃고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괜찮다고 상대방 앞에 자신을 낮춰버리며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늘 그렇진 않지만 우리도 그런 순간들이 있지 않나. 그런 순간이 극대화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힘들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대처가 되지 않는 순간 자해를 한 것 같다. 정말 힘들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한 순간에 나왔던 게 아닌가 싶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고 이해하고 연기했다.”

영화 ‘세자매’에서 진정성 있는 열연을 보여준 김선영 스틸컷. /리틀빅픽처스
영화 ‘세자매’에서 진정성 있는 열연을 보여준 김선영 스틸컷. /리틀빅픽처스

-희숙은 어떤 무시를 당해도 힘든 일이 있어도 웃으며 반응한다. 그 웃음이 더 아프게 다가왔는데, 감독의 의도였나 배우의 해석이었나.
“배우의 해석이다.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조차도 자신이 없는 거다. 그러면 상대가 더 힘들어할 수 있으니까 혹은 상대가 나를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처음엔 괜찮아하면서 웃는 게 습관이 됐을 거다. 그런 해석으로 접근하면서 매번 농도를 다르게 표현했다.”

-희숙은 반항적인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하다. 엄마로서 희숙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갑자기 눈물이 난다. 안 좋은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희숙은 좋은 엄마 같지 않다. 딸 불행의 근원이 엄마의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교육은 엄마의 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나도 내 딸에게 행복한 엄마이고 싶어서, 내 행복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희숙은 딸에게 자신의 불행을 많이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딸은 불행을 답습했다. 한 인물로서는 공감이 가지만, 딸에게 불행을 전수한 엄마이지 않나 생각했다. 슬프다. 그런데 그런 엄마들이 의외로 많다. 이 시대에, 또는 지난 시대에, 앞으로의 시대에도 그럴 거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 작품이었다. 김선영에게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어떤 의미인가.
“가족은 끊어낼 수 없잖나. 내게 주는 의미를 다 차치하더라도 가족은 끊어낼 수 없다. 그게 어떻게 보면 굴레일 수 있고, 가족이라는 것 자체가 폭력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교육학자가 한 이야기인데,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악마가 부모라는 말이 있다. 대학교 때 들었는데 인상적이라 아직도 기억이 난다. 가족이라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끊어질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는 사람이다. 그다음에 이 관계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는 나의 선택과 가치관의 문제인 거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게 나의 가족도 행복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남편 이승원 감독과 촬영은 어땠나. 평소 영화적 취향이나 가치관이 비슷한가.
“거의 비슷하다. 신기할 만큼. 연기에 대한 생각도 굉장히 비슷하다. 웃음 코드가 잘 맞는다. 남들은 안 웃긴데 우리 둘만 웃긴 순간들이 있다. ‘웃기지?’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눈만 보고 둘만 딱 웃는다. 극단 나베를 운영하고 있는데, 나는 연기 디렉팅을 하고 남편은 연출을 한다. 극단에서 지금까지 계속 작품을 해왔다. 작업자로서 이미 오랫동안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매체가 다르긴 했지만, 익숙하고 편안하고 행복했다.”

‘세자매’에서 호흡을 맞춘 (왼쪽부터) 문소리와 김선영, 장윤주. /리틀빅픽처스​
‘세자매’에서 호흡을 맞춘 (왼쪽부터) 문소리와 김선영, 장윤주. /리틀빅픽처스​

-여배우들끼리 함께하는 작업이 많지 않은데, 문소리‧장윤주와 호흡은 어땠나.
“정말 많지 않다. 세계적으로. 그래도 이제 조금은 많아지는 추세인데, 그래서 더 특별했다. 내겐 다시없을 일인 것 같다.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배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이 감독인 덕분에 이런 작업도 하는 거다.(웃음) 하루하루 지나가는 게 아쉬웠다. 한 1년 찍고 싶었다. 너무 재밌고 좋았다.”

-‘허스토리’ 김희애, ‘내가 죽던 날’ 김혜수‧이정은 등 함께 작업한 배우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건 남다른 의미일 것 같은데.
“내 꿈이었다. 연극할 때 다시 함께 연기하고 싶다 싶은 배우들이 있었다. 내겐 상대 배우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문득 나랑 했던 배우들도 다시 나와 만나고 싶다고 생각할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나도 그런 배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꽂힌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 좋은 얘기를 해주시니… 결국엔 주고받는 것 같다. 내가 먼저 그분들을 정말 좋아했다. 잘 맞으면 서로를 그렇게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 내겐 너무 행운이다. 그런 칭찬을 받았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언니들 너무 보고 싶다.”

-감정이 메말라버린 것 같아 공포를 느낀 순간이 있었다고. 어떻게 극복했나.
“최근 일이다. ‘세자매’ 끝나고 쉬지를 않았다. 거의 맞물려서 작품을 했고, 한 번도 연기를 쉰 달이 없었다. ‘오! 삼광빌라’ 찍을 때였는데, 갑자기 마른 나뭇잎처럼 감정이 안 나오는 거다. 그래서 공포를 느꼈다. 그 순간엔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써본다. 그런데 나는 연기를 ‘애써서’ 하는 걸 되게 싫어한다. 느껴져서 나오면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감정을 내기 위해 노력하고 계획하는 연기를 싫어한다. 그런데 그때는 애써서 해야 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 너무 속상하더라. 극복까진 아니지만, 지금은 다시 괜찮아졌다. 차차 괜찮아지더라.”

-직접 연기 디렉팅도 하는데, 후배들에게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면.
“극단 후배들에게 디렉팅을 하는데, 특별한 건 없고 진정성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진정성 있는 연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아마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진짜가 아닌 것 같은데?’일 거다. 진정성이 기본이다. 그다음은 창의성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볼펜으로 무언가 쓸 때 진짜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쓸 것인가도 중요해졌다. 워낙 많은 작품들이 있으니, 볼펜을 쓸 때도 시선을 멈추게 해야 하지 않겠나. 진정성 있으면서 창의적인 표현이 무엇인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선영이 동료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소감을 전했다./리틀빅픽처스
김선영이 동료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소감을 전했다./리틀빅픽처스

-대중에게 어떤 배우로 각인되고 싶은가.
“나 자신에 대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 그냥 내가 연기한 인물들을 그 작품에서 기억해 주면 좋겠다. 그 인물이 어떤 위로가 되고 즐거움이 된다면, 그걸로 좋다. 그게 내 목표고 연기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다. 또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건 큰 위로이지 않나. 한 개인에게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연기로 보여주고, 그런 에너지를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 

-‘세자매’가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으면 하나.
“나는 작품의 주제나 의미에 대해 문자화하고 경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람마다 각자의 일상이 있고, 똑같은 작품이라도 순간이 다 다르기 때문에 내 바람이 관객들에게 동등하게 가지 않고, 그런 기대도 없다. 단지 인간은 내 손톱 밑의 가시가 가장 아프고,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모든 이들이 우리 작품을 보고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나만 이렇게 힘들고 맺혀있고, 풀지 못한 숙제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고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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