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대 국회에서 발의됐으나 폐기된 법안이 15,000여건에 달한다. 이 중에는 법안이 통과될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지만,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처럼 많은 법안이 국회에서 잠자는 이유는 이해당자들간의 첨예한 대립 때문이다. 일부 법안은 이해당사자들의 물밑로비로 논의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폐기되기 일쑤다. <시사위크>는 국회에 계류된 법안이 왜 처리되지 못했는지 그 과정을 쫓고자 한다. 법안이 발의된 배경과 국회에서 잠만 자야 하는지를 추적했다.

지난 2007년 처음 국회에 발의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갈등은 10년이 훌쩍 넘는 동안 이어지고 있다. /뉴시스
지난 2007년 처음 국회에 발의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갈등은 10년이 훌쩍 넘는 동안 이어지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권신구 기자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역사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로 정부안(2007년 발의)이 탄생한 것이 처음이다. 이를 포함해 지난 2013년까지 7차례 입법이 시도됐다. 하지만 번번이 마주한 것은 ‘좌절’이었다. 19대 국회에서 김한길‧최원식 전 민주통합당 의원이 발의에 나섰다가 반대에 부딪혀 직접 철회하기도 했다.

20대 국회에서 발의조차 되지 않았던 이 법안이 장혜영 정의당 의원 손에서 다시 태어났다. 8번째 도전이다. 장 의원은 지난해 6월 가까스로 10명의 의원 서명을 받아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 

이번에도 반발은 만만찮았다. 무엇보다 종교계를 중심으로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우려가 새어 나왔다. 법안을 당론으로 채택한 정의당 국회의원들과 의원실에는 항의 전화와 문자가 빗발쳤다. 지난해 7월 국회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에 차별금지법 관련 찬반 청원이 1~2위를 다투며 양측의 대리전 양상을 보였다.

잠자고 있던 법안 제정 목소리는 고(故) 변희수 하사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 제정에 앞장서 온 정의당은 “개인의 비극적 선택이 아닌 우리 사회가 차별과 혐오라는 가해를 묵인하고 방치한 사회적 타살”이라며 법 제정에 목소리를 높였다. 

법안을 발의한 장 의원은 이 법에 대해 ‘민주사회에 꼭 필요한 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시사위크>와 만나 “민주주의를 학습해가는 데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다원성이다. 아무리 서로 다른 불평등한 조건하에서 생활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불가침한 존엄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어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해도 된다고 믿는 순간 전쟁과 학살 등 역사 속에서 익히 보았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회에 발의됐던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총 7번이다. 이들은 모두 폐기·철회 수순을 밟았다. 21대 국회에서는 장혜영 의원이 8번째 법안을 내놓았다. /그래픽=김상석 기자 

◇ 불명확한 ‘차별’ 구체화… ‘가이드라인’ 역할 기대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차별 사유와 영역, 차별금지 유형을 구체화하고 있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 국가‧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 지역, 신체조건,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 병력 또는 건강 상태 등 총 23가지의 차별 금지 사유를 명시했다.

적용 영역도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앞선 사유를 이유로 고용, 재화‧용역, 교육, 행정 서비스의 제공이나 이용에서 불리한 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상의 필수적인 영역에서 차별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사실상 우리 사회의 ‘차별’이라는 영역이 불명확하다는 데서 법이 출발했다는 것이 장 의원의 설명이다. 장 의원은 “어떤 것은 명백한 차별이기도 하지만, 애매한 경우에는 차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 공적으로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의 절차가 정해지지 않았다”며 ″그런 부분을 보완해서 헌법에 명시된 평등권을 일상에서 실현하기 위해 제안됐던 게 차별금지법″이라고 설명했다.

차별 피해자의 ‘구제’도 강화됐다. 차별금지법안에 따르면, 차별을 당한 당사자가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하면 인권위는 시정명령을 할 수 있게 된다.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3,000만원 이하의 이행 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됐다. 중대 사안의 경우 인권위가 소송을 지원하고, 입증책임을 상대방에게 부담하게 할 수 있다. 비슷한 법인 인권위원회법보다 강제력이 한층 높아진 셈이다.

장 의원은 법이 사실상 우리 사회의 ‘차별 감수성’을 높여주는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최근 ‘인공지능(AI) 이루다’ 사태를 일례로 들었다. 실제 대화 데이터를 학습한 인공지능 챗봇 이루다는 성차별, 인종 등에 대한 혐오 발언으로 논란됐고, 개발사의 서비스 종료로 이어졌다.

장 의원은 “기본적으로 개발자와 기획자의 윤리 안에 무엇이 차별에 대한 기본 가이드인가 할 때 이 법이 제정됐다면 최소한 이 법에서 금지하는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장치를 뒀을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법률로 정한 차별 기준이 없기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부분이 많았다. (이 법은) 거기서 완전히 첫 단추를 다시 끼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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