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임성미가 영화 ‘파이터’(감독 윤재호)로 관객 앞에 선다. /인디스토리
배우 임성미가 영화 ‘파이터’(감독 윤재호)로 관객 앞에 선다. /인디스토리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대중에겐 낯선 배우 임성미는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탄탄히 내공을 쌓아온 14년 차 배우다. 개성 넘치는 얼굴과 정형화되지 않은 연기로 독립영화팬들 사이에선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은 실력파다. 그리고 첫 타이틀롤을 맡은 장편영화 ‘파이터’(감독 윤재호)를 통해 더 많은 관객 앞에서 자신의 진가를 증명할 예정이다.

영화 ‘파이터’는 복싱을 통해 자신의 삶과 처음 직면해 비로소 삶의 동력을 얻게 된 진아(임성미 분)의 성장의 시간을 담은 작품으로, ‘마담B’(2018)와 ‘뷰티풀 데이즈’(2018) 등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들며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을 조명해오고 있는 윤재호 감독의 신작이다.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과 올해의 배우상, 2관왕을 차지한 데 이어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경쟁 부문 14플러스 섹션에 공식 초청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임성미는 윤재호 감독의 통찰력과 따뜻한 시선이 고스란히 묻어난 ‘파이터’에 단숨에 매료됐다. 여성중심 서사라는 점과 좀처럼 보기 힘든 여성스포츠를 다룬 작품이라는 것에서도 욕심이 났다고.   

“첫 느낌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날씬하고 정리 정돈이 아주 잘 된 시나리오라는 거였어요. 굉장히 시간을 많이 들였구나 생각이 들었죠. 어떻게 이런 시나리오를 쓰게 됐는지 감독님과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반가운 시나리오였어요. 여성을 주체로 하고, 1인칭 시점에다가 여성스포츠를 다루는 탐날 만한 부분이 있었죠. 또 윤재호 감독님의 전작을 재밌게 잘 봤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날 선택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부담스럽지 않게 어필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웃음)”

윤재호 감독도 첫눈에 임성미의 진가를 알아봤다. 그녀라면 세상의 벽에 부딪혀 상처투성이지만, 다시 일어나고야 마는 투지 넘치는 진아를 잘 완성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첫 만남의 자리에서 바로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영화 ‘파이터’에서 탈북민 여성 복서 진아를 연기한 임성미 스틸컷. /인디스토리
영화 ‘파이터’에서 탈북민 여성 복서 진아를 연기한 임성미 스틸컷. /인디스토리

윤 감독의 선택은 옳았다. 임성미는 진아 그 자체로 분해 감독의 믿음에 화답했다. 짧은 준비 기간에도 불구하고, 북한 사투리와 복싱을 완벽히 체득한 것은 물론, 탈북민 진아의 삶을 밀도 높은 내면 연기로 사실적으로 그려내 호평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시간이 부족했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복싱과 언어, 두 가지는 반드시 완벽하게 수행해야겠다는 목적의식이 뚜렷이 있었어요. 그런데 훈련량이 부족했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더 있었으면 더 밀도 있는 복싱을 보여줬을 텐데 아쉬워요.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정말 저 인물이 돼가고 있다는 걸 거북스럽지 않게 표현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고 봐요. 하긴 더 시간이 있었더라도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원했을 것도 같네요.”

임성미는 진아의 숨소리조차 허투루 담아내지 않았다.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대한 설움과 이겨내려는 의지, 엄마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숨길 수 없는 그리움, 태수를 향한 불안함과 설렘 등 진아의 양가적 감정들을 섬세하게 그렸다. 특히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강렬한 눈빛 연기는 스크린을 압도한다. 임성미는 “쌍꺼풀 없이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라며 웃었다.

“(눈 때문에) 가끔씩 울었냐는 소리를 듣기도 해요. 기분이 좋고 재밌는 상태인데도 슬프냐고 하더라고요. 하하. 진아가 엄마네 집 마당을 기웃거리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눈에 다래끼가 났어요. 아침에 보고 ‘어떡하지’ 했는데 감독님이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백서빈(태수 역) 배우는 다래끼가 분장인 줄 알고 감탄하더라고요. 눈빛이 좋다는 칭찬을 많이 해주시는데, 눈물이 차오르는 모습까지 감독님과 카메라 감독님이 집중력 있게 잘 담아주신 덕분인 것 같아요. 감정이 표현되는 과정을 잘 캐치해서 담아주신 것 같아 감사해요.”

진아로 분한 임성미의 눈빛 연기가 잊히지 않는다. /인디스토리
진아로 분한 임성미의 눈빛 연기가 잊히지 않는다. /인디스토리

실제 탈북민이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진아로 살아 숨 쉰 임성미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인물을 이해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임성미는 “진짜 진아가 될 순 없겠지만, 심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며 순간순간 진아의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자 노력했다고 전했다. 또 진아와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에도 깊은 고민을 기울였다고.

“진아라는 인물을 소화해내야 하는 건 마땅하지만, 거기에 추가적으로 다른 등장인물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고민했어요. 영화가 친절하게 관계 맺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거든요. 찰나로 보여준다거나 보이지 않은 관계를 툭하고 끄집어내요. 그런 지점이 있었기 때문에 드라마적으로 설득이 안 되면 관객이 지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놓치지 않고 가려고 집중했어요.”

이러한 열연으로 임성미는 데뷔 후 처음으로 영화제에서 배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 상은 14년 동안 흔들림 없이 묵묵히 배우라는 길을 걸어온 그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자, 앞으로 나아갈 그에게 ‘자신감’이라는 값진 선물이 됐다.

“예전에는 자아가 없는 사람처럼 겸손하려고 했어요. 경거망동에 대한 우려심이 있었거든요. 졸업을 앞두고 교수님이 ‘겸손이 제일 어렵고 배우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갖춰야 할 부분인데, 학교에서 알려줄 순 없다. 겸손해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래서 겸손하지 않은 배우가 될까 봐 항상 걱정하면서 지낸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10% 정도는 덜어내고 자신감으로 전환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인정받은 거잖아요. 잘했다고 주신 상이니까요.(웃음)”

임성미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디스토리
임성미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디스토리

임성미는 단편영화 ‘복자’(2008)로 주목받은 뒤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로 첫 장편영화를 소화했다. 이후 영화 ‘환상속의 그대’(2012), ‘오늘영화’(2014), ‘돌연변이’(2015), ‘연애담’(2016), ‘너와 극장에서’(2017), ‘판소리 복서’(2018) 등과 드라마 ‘프로듀사’(2015), ‘동백꽃 필 무렵’(2019), ‘사랑의 불시착’(2019), ‘날아라 개천용’(2020),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2021)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단역에서 조연, 이번 ‘파이터’ 첫 장편 타이틀롤까지, 길다면 긴 시간이 걸렸지만 임성미가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연기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 때문이다. 작품을 위해 아무리 힘을 쏟아도 더 큰 에너지를 받아 간다며 연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그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지루했거나 내 삶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거예요. 그런데 질렸던 적이 없었어요. 힘들었던 적도 있고 연기하는 나 자신에게 질렸던 적도 있지만 연기 자체는 그렇지 않았어요. 연기가 주는 힘을 계속 받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진아를 통해서도 제가 채워진 부분이 더 많아요. 내가 힘을 보태려고 힘을 썼는데, 되레 그 힘을 다시 주더라고요. 진아는 앞으로 지치거나 힘들 때 꺼내볼 수 있는 구급약이 될 것 같아요. 그 힘을 전환하거나 증폭시켜서 다시 어딘가에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사회에 한 발을 내디딘 초년생 같아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겠고, 수많은 편견이 기다리고 있겠어요. 다양한 시선은 좋지만, 나를 죽이는 시선으로부터 내가 죽을 필요는 없잖아요. 기꺼이 방어하고 지켜낼 수 있는 싸움을 해나갈 생각이에요. 그런 싸움은 건설적인 싸움이고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요. 때로는 지켜나가고 때로는 피해 가면서 조금 더 유일무이한 배우로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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