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배우 홍경. /그린나래미디어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배우 홍경. /그린나래미디어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독립영화든 상업영화든, 주류든 비주류든 하고 싶은 이야기라면 주저하지 않는다. 자폐장애인부터 성소수자까지 약자들의 삶을 대변하며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다. 또래 배우와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배우 홍경의 이야기다.

홍경은 2017년 방영된 KBS 2TV ‘학교 2017’을 통해 데뷔했다. 이후 드라마 ‘저글러스’ ‘라이브’ ‘라이프 온 마스’ ‘동네변호사 조들호2: 죄와 벌’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스크린 행보도 돋보인다. 첫 스크린 데뷔작 ‘결백’(2020, 감독 박상현)을 통해 자폐성 장애를 가진 정수 역을 맡아 어려운 역할임에도 안정적으로 소화하며 호평을 이끌어냈다.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 ‘정말 먼 곳’(감독 박근영)도 도전을 요하는 작품이다. 첫 장편 데뷔작 ‘한강에게’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박근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정말 먼 곳’은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은 진우(강길우 분)가 그의 동성 연인 현민(홍경 분)과 뜻하지 않은 방문자가 도착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하는 일상을 담은 퀴어 영화.

극 중 홍경은 진우의 연인이자 시인 현민으로 분해 전작과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줬다. 특히 현민은 진우와 달리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시종일관 한결같은 톤을 유지하는데, 홍경은 그 안에서도 눈빛,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섬세하게 담아내 인물의 감정을 오롯이 전달해냈다. 한층 성숙한 연기력을 보여주며 또 한걸음 성장한 홍경이다.

최근 진행된 화상 인터뷰에서 만난 홍경은 부드러움 속 단단한 매력을 품고 있었다. 그가 뱉은 모든 말엔 꾸밈이 없었고, 차분함 속 단단한 소신이 느껴졌다. 기자의 질문 하나하나에 신중한 답을 내놓는 그의 모습에서 매 작품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짐작하게 했다. 홍경의 앞날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결백’에 이어 ‘정말 먼 곳’까지 도전적인 작품을 택하고 있는 홍경. /그린나래미디어
‘결백’에 이어 ‘정말 먼 곳’까지 도전적인 작품을 택하고 있는 홍경. /그린나래미디어

-‘결백’에 이어 ‘정말 먼 곳’까지 두 편의 작품이 코로나19 시국 속 개봉하게 됐다. 아쉽진 않나.  
“아쉽지만 동시에 되게 감사하다. 개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어려운 시국에도 개봉을 하고, 또 영화관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계시잖나. 감사하게 생각한다. ‘정말 먼 곳’은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광이 담겨서 시각적으로도 만족하실 거다. 영화가 진우의 시점으로 흘러가지만, 진우와 현민의 감정에만 중점을 두지 않는다. 각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가족에 대한, 우리 주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마음 편히 봐주셨으면 좋겠다.”

-처음 시나리오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나.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퀴어 소재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는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다르다는 것과 나로선 해볼 수 없는 것들에 매력을 느꼈고,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시나리오 봤을 때 소소하지만 울림 큰 단편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푹 빠져서 읽었다. 잔잔하지만 큰 울림이 있었다. 읽으면서 현민에 대해 궁금했다. 현민의 심정이나 상황이 직접적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현민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도 없어서 궁금했다. 이 친구는 어떻게 항상 웃고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까. 표면적으로 항상 밝고 누군가를 이해한다. 어느 경지에 이른 사람처럼, 시종일관 여유가 있고 차분하다. 연기하면서 현민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찾아나갔고, 동시에 쉽지 않았다. 그동안 연기를 하면서는 내가 굳이 발견하지 않아도 대본에 표현된 것을 이해하고 연기하면 됐다. 그런데 현민은 그렇지 않아서 어려웠다. 영화가 거리감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화면적으로도 거리감이 느껴지게 담았다. 현민 자체도 그랬다. 거리감을 두고 지켜보는 순간이 많았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서 그런 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 ‘거리두기’ 때문에 현민이 굉장히 어른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현민은 누군가를 잘 이해하고 지켜봐 준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마음을 공감해 주고 위로를 건넨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연민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해석한 건 ‘현민도 일종의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보호막이 생긴 게 아닐까’였다. 어려움과 아픔이 있었을 거다. 그런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 가면을 썼을 거다. 가면이라고 해서 나쁜 건 아니다. 이겨내기 위한 장치를 만든 거라고 생각했다. 동정이 가기도 했다.” 

‘정말 먼 곳’에서 시인 현민을 연기한 홍경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정말 먼 곳’에서 시인 현민을 연기한 홍경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절제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정말 어려웠다. 나라면 조금 더 표현했을 거다. ‘나도 서운해’라고 말했을 것 같은데, 현민은 그렇지 않아서 감독님과 그런 부분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눴다. ‘여기에서도 이 친구는 웃어요? 그냥 지켜봐요?’ 계속 질문했던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니 그런 선택이 현민의 캐릭터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또 그러한 감정이 모여서 폭발하는 시점이 더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상대역 강길우와 호흡이 굉장히 중요했다. 촬영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은데. 
“현민과 진우에 관해 이야기를 정말 많이 나눴다. 촬영할 때 같이 합숙하면서 생활을 했는데,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형(강길우)이 열린 사람이라 가능했던 것 같다. 주로 현민과 진우가 어떤 사랑을 나눴을까, 이들의 관계는 얼마나 깊을까, 얼마나 사랑을 이어나갔을까, 어려움은 무엇이었을까 이야기를 나눴다. 너무 깊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다 보니 차곡차곡 쌓였다. 또 차 안에서 둘의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이 둘의 심정이 어떨지 앞으로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다.”

-현민이 처음 등장했을 때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를 느낄 수 있었다. 별다른 말없이도 두 사람의 관계를 관객이 알아차려야 하고, 또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그려내야 했는데 어떻게 맞춰나갔는지 궁금하다.  
“그런 점들이 좋았다. LGBT(성소수자)라고 해서, 직접적으로 장면을 드러내지 않잖나. 자연스러운 장면을 통해 관객에게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 눈빛, 처음 포옹하는 장면, 뒤에서 껴안는 장면에서 둘의 떨어져 있던 시간들이 느껴진다. 첫 장면에서 둘의 관계가 잘 드러나야 했기 때문에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플롯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글로 쓰여있는 대로만 하자는 마음을 갖고 했다. 또 그 장면은 한 번에 갔어야 했다. 시골이라서 버스가 많이 다니지 않았고, 그 시간에 오는 버스가 하나라 한 번에 해내야 해서 높은 긴장감을 갖고 촬영했던 장면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살아있는 느낌이 담기지 않았나 싶다.” 

홍경이 ‘정말 먼 곳’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린나래미디어
홍경이 ‘정말 먼 곳’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린나래미디어

-아름다운 영상미도 영화의 큰 강점이다. 촬영하면서도 힐링이 됐을 것 같은데.
“맞다. 한국영화에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던 것 같은데, 우리 영화엔 잘 담겼다. 촬영하면서도 힐링이었다. 양떼목장이나, 강이 보이고, 그 강을 양쪽에서 산이 감싸고 있는 곳도 너무 좋았다. 그곳에 갈 때마다 힐링이 됐다. 또 동물들과 같이 촬영한다는 게 쉽지 기회이기도 하고, 색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서정적이고 잔잔한 그 공간이 주는 힘이 있었다. 배우들과 감독님도 그 장소처럼 참 조화로웠고,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을 보면 물안개가 껴있고 새소리가 들리고 정말 좋았다. 푹 쉬다 온 기분이다.”

-‘결백’ 자폐성 장애를 가진 정수 역에 이어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정말 먼 곳’ 현민까지, 어려운 역할과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 이런 결의 작품에 끌리는 편인가.
“아직 작품을 택할 입장은 아니다.(웃음) ‘정말 먼 곳’은 먼저 제의해 주시긴 했다. 어려운 것을 해내고 싶다는 로드맵을 짜놓고 연기하진 않는다. 다만 지금 내 나이대에 겪는 것들, 앞으로 겪어나갈 것에 대한, 옆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해 더 많이 끌리는 것 같다. 여운을 느끼고, 가깝게 연결됐다는 것을 느끼면 끌리게 되더라. ‘결백’에서 정수라는 역할도 그렇고, ‘정말 먼 곳’의 현민도 그렇고 도전적으로 다가왔고, 연기하면서 어렵기도 했지만 새로운 것들 발견하고 이해하고 그려나가는데 큰 매력이 있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낀 지점이 있다면.
“매 순간 느끼는 건 작품을 하면서는 모른다는 거다. 완성된 작품을 보고, 인터뷰를 하거나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때를 떠올리면 내가 어떤 걸 했고 이 작품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고, 내 캐릭터가 어떻게 그려졌고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 많은 점을 배우고 느낀다. 이번 ‘정말 먼 곳’을 통해서는 현장에서 느낀 게 크다. 현장이 정말 좋았는데, 나 혼자 할 수 없는 거라는 걸 알았다. 혼자 연기를 하는 거지만 혼자 할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은 항상 했는데, 이 앙상블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꼈다. 상대 배우와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배웠다. 실제 관계가 가까워야 영화에도 꼭 그렇게 담기는 건 아니지만, 그런 점들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됐다. 현장에서 만들어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걸 배우고 느꼈고, 성장하게 됐다.”

-본인이 생각하는 배우로서 홍경의 강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스스로 그런 부분에 대해 생각하진 않는다. 생각하기도 오글거리고.(웃음) 지금 당장 생각해 본다면, 어느 배우들이나 다 똑같겠지만, 잘 듣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인물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는 호기심이 있다. 굳이 꼽자면, 그게 장점일 것 같다. 실제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필름 카메라를 항상 갖고 다니는데, 인물 사진을 많이 찍는다. 그런 점들이 내겐 강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단점이라고 한다면 마른 몸? 하하. 운동을 하라고 주변에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걸 보니 마른 몸이 확실히 단점인 것 같다. 하지만 해외에도 마른 배우들이 있는 것처럼, 한국에도 마른 배우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웃음)”

앞날이 더 기대되는 홍경. /그린나래미디어
앞날이 더 기대되는 홍경. /그린나래미디어

-데뷔 후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오고 있다. 목표를 세웠던 게 있는지, 그 목표를 이뤘는지 궁금하다.
“여러 매체를 다양하게 경험하고 싶었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이 컸다. 또 또래 배우들과 조금은 다른 길을 가고 싶었고, 색다른 작품에서 도전적인 연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결백’을 통해 이뤄졌다. 정수라는 인물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캐릭터도 아니고, 첫 작품을 그렇게 하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배우로서 도전적인 작품이고 역할이었기 때문에 정말 뜻깊었다. ‘정말 먼 곳’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역할이 아니잖나.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는 볼 수 있고 어디에서든 숨 쉴 수 있는 캐릭터다. 그래서 좋았다. 내게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을 이뤄나가고 있는 것 같다.”

-영화 그리고 연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다. 연기의 재미나 영화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어떤 점에 매료돼 배우로 살고 있나.
“영화도 그렇고 드라마나 연극, 매체 자체를 되게 좋아하고 사랑한다. 뭔가 다른 세계 같잖나. 그렇다고 우리와 먼 얘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전혀 알 수 없는 세계도 볼 수 있는 게 매력인 것 같다. 영화라는 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속 지나갈 수 있고 스쳐갈 수 있는 것들을 재조명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개인의 과거나 감정, 동심을 자극하는 부분도 있고 가족이나 더 나아가 사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그런 점이 영화라는 매체에 매력을 느끼게 했다. 연기의 재미는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발견하고 그려낸다는 것이 좋다. 어렵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아직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기도 하고 경험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그런 점에 매료됐다.”  

-앞으론 어떻게 쌓아나가고 싶은지.
“더 많이 하고 싶다. 다양한 작품과 그 안에서 깊이 있는 모습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보여주고 싶다. 진짜인 모습들.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특정 짓거나 작품을 정해놓는 건 아니지만, 10대 때 느낀 거나 20대 지금 살아가면서 느끼고, 겪는 것들이 잘 담긴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 우리 세대만 할 수 있는 것이고, 내 나이대에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크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하고 싶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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