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이 또 한 편의 시대극 ‘자산어보’로 돌아왔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이준익 감독이 또 한 편의 시대극 ‘자산어보’로 돌아왔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이준익 감독은 영화 ‘왕의 남자’(2005)로 사극 최초로 천만 영화 신화를 써낸 것을 시작으로, 영화 ‘사도’(2015), ‘동주’(2016), ‘박열’(2017) 등을 통해 역사 속 인물을 새롭게 재조명하며 ‘시대극의 대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사건’보다 아닌 ‘사람’에 집중해 울림을 선사하는 것은 물론, 현시대까지 관통하는 가치를 찾아내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과 깊은 신뢰를 받아왔다. 그가 또 한 편의 시대극 ‘자산어보’로 돌아왔다.

이준익 감독의 열네 번째 연출작 ‘자산어보’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설경구 분)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 분)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를 통해 대중에게 친숙한 정약용이 아닌, 그의 형이자 조선시대 학자 정약전의 생애를 조명, 새로운 이야기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여기에 신분도 가치관도 다른 약전과 창대가 서로의 스승과 벗이 돼 참된 삶의 가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흑백 필름 안에 심도 있게 그려내 호평을 얻고 있다.

개봉에 앞서 <시사위크>와 만난 이준익 감독은 “상업적으로 어려운 소재의 영화”라면서 “어렵게 공부하고 관객에게 쉽게 전달하고자 노력했다”고 연출에 중점을 둔 부분을 밝혔다. 그러면서 “이 영화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건 오롯이 배우의 열연 덕”이라며 배우들에게 공을 돌렸다. 

흑백 필름 안에 담아낸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흑백 필름 안에 담아낸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잘 알려진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을 주목한 이유가 있다면.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안 읽었다. 나도 안 읽어봐서 몰랐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읽어보니, 지금으로 치면 ‘공무원 지침서’ 같은 거다. 관료들의 행동강령을 쓴 거다. 그의 형이 쓴 <자산어보>는 읽어본 사람이 더 없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 책은 자연과학서다. 바다생물에 관한 기록이었다. 같은 시대에 형제가 똑같이 유배를 갔는데, 한 사람은 인문과학서를 쓰고, 한 사람은 자연과학서를 썼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시작했다. 이유가 뭘까 따져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구나 싶었다. 동시대를 살아도 개인차가 있듯 정약용과 정약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 차이가 있었다. 상업적으로 어려운 영화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이 영화를 하겠다는 내가 미쳤지 싶었다. 섬 청년 창대가 ‘자산어보의 길이 아닌 목민심서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데, <자산어보>의 길은 무엇이고 <목민심서>의 길은 무엇인지, 관객에게 쉽게 잘 전달하려고 노력한 영화다.”

-정약전과 창대가 서로를 만나 채워간다. 두 사람을 통해 정약전, 창대의 어떤 점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창대는 우물 안 개구리다. 흑산도에서만 살았으니까. 그런데 우물 밖 개구리(정약전)가 섬으로 들어온 거다. 정약전이 침울한 심정으로 섬에 왔는데 우물 밖을 꿈꾸던 애가 하나 있는 거다. 이야기를 해보니 정직하고 신실하다. 그런데 창대는 우물 밖에서 들어온 개구리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사학죄인과는 어울리지 않겠다고 한다. 하지만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과거를 봐야 하는데, 섬 구석에서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정약전 한 명뿐인 거다. 내키진 않지만 물고기를 가르쳐주기로 하고 못 이기는 척 넘어간다. 처음엔 이득을 취하려고 했고, 배우는 동기가 불량했으나 막상 배워보니 우물 안에서 알 수 없는 놀라운 수준의 지식이 쌓이게 되고 창대도 바뀌게 된다. 굉장히 성숙하게 되는 거다. 그러나 원래 갖고 있던 야망이 있었고, 식구들을 위해서라는 좋은 명분도 있었다. 또 무너진 성리학을 바로 세우고, 정의롭게 고쳐보겠다는 정당한 명분이 있으니 과감히 스승을 버리고 뭍으로 갈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우수한 그 길을 가려고 해도 위아래가 다 썩어서 창대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약전을 배신하고 목민심서의 길도 제대로 가지 못하는, 배운 대로 살지도 못하는 자기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상실감이 있었을 거다. 그 장면과 함께 약전이 갑오징어에 대해 설명을 한다. 먹물이 맑고 투명하고 선명하며, 그 뼈는 나쁜 병을 치유하는 약으로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창대를 은유하는 거다. 창대의 지식과 생각은 정말 막고 투명한데, 더러운 물이 들어가서 어떻게 해보려는 순간 흐려지는 것 같더니, 다시 불의를 참지 못하고 선명하게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창대의 행동을 멀리 있는 약전이 응원하는 은유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약전과 창대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과정,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지점이다.” 

시대극의 대가로 불리는 이준익 감독.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시대극의 대가로 불리는 이준익 감독.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처음 약전이 흑산도에 배를 들어갈 때 모습은 흑백으로 담겼는데, 말미 창대가 흑산으로 돌아올 때 모습은 컬러로 담아냈다.
“같은 검은색이라도 그냥 블랙이 있고, 여러 색이 묻어서 검정이 되는 경우가 있다. 흑산은 본래 어두운 검정이다. 흑산(黑山)이 자산(玆山)으로 바뀌는 건, 다양한 색이 다 섞여서 만들어진 검정을 의미한다. 약전이 들어갈 때 흑산은 무섭고 두려웠으나, 창대가 돌아갈 땐 자색으로 바뀐다. 상징적으로 그린 것 아니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해석이 그렇게 가는 게 아닌가 싶다.”

-컬러로 담긴 장면이 몇 있었는데, 시나리오 쓸 때부터 의도한 건지.
“그렇다. 예를 들어, 창대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라는 약전의 말을 되새기는 순간 컬러로 바뀐다. 이는 창대가 그전까지 약전이라는 사람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본 거다. 그런데 보고 싶은 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 대로 보니 자신이 전혀 보지 못했던 세상이 보이는 거다. 그래서 컬러다. 세상 안에 갇혀 바라본 것은 흑산이고, 보이는 대로 봤더니 못 보던 게 보이면, 그게 자산이 되는 거다.” 

-흑백 영화를 연출할 때 연출적으로 차이가 있을까.
“연출적 차이보다 기술적 차이가 있다. 기술적이라고 하는 건 일단 미술소품이나 눈에 보이는 것들이 색깔이 있으면 어지럽다. 컬러면 오히려 배색을 해서 같이 담아낼 수 있는데, 그걸 흑백으로 바꾸면 두서가 어지러우니까 흑백에 맞게 배치하고 흑백에 맞게 명도 차이를 둔다. 의상도 마찬가지다. 의상의 색감이 없으니 질감으로 표현해야 하고 분장도 그렇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과 그림자, 밝음과 어둠밖에 없으니 컬러로 준비할 때와는 다르다. 그런데 그런 준비를 하는 게 어려운 건 아니다. 워낙 우리 분장팀이 실력이 뛰어나고, 한국 배우들의 연기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어려운 건 아니다. 더한 것도 하는데 뭐.”

-흑백임에도 색감이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는데.
“세련돼서 그렇다. 흑백은 이제 옛날 한물간 비주얼이 아니다. 과거 컬러가 나오기 전, 부족했던 기술로 나왔던 흑백은 한물 간 게 맞다. 그러나 모든 컬러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Full HD 화질이 나오는 시대의 흑백은 세련되고 멋있고 특별한 거다. 있지도 않은 컬러가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선입견이 있는데, 흑백은 컬러보다 더 세련된 선택이다.”

‘자산어보’에서 창대를 연기한 변요한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에서 창대를 연기한 변요한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창대를 연기한 변요한이 이렇게까지 잘 어울리고 잘 해낼 줄 몰랐다. 어떻게 창대 역에 변요한을 떠올리게 됐나.
“설경구가 추천했다. 물어보니 스케줄이 된다고 하더라. 아무리 하고 싶은 배우라도 스케줄이 안 되면 안 되는 거다. 대한민국 배우는 자기에게 주어지면 상상초월의 역량을 발휘한다. 변요한이 그것을 증명한 거다. 대단한 배우다. 우리나라 배우들 존경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안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을 해내려고 하는 간절함이 너무 멋있고 매력 있다. 영화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임하는 자세와 노력이 멋있는 거다. 나라면 못한다. 보이는 것만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한 노력과 그의 태도, 마음가짐이 너무 훌륭했다. 그런 것들을 알아봐 줘야 하고 찾아내야 한다. 그 나이에 그렇게 치열한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창대는 온전히 변요한의 것이다. 내가 이래라저래라 한 게 없다. 캐릭터는 자신이 만드는 거다.”

-정약전 역의 설경구 역시 첫 사극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는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렇다. 그동안 사극에서 조선의 선비 이미지를 가진 주인공이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설경구가 조선 선비의 대표성을 띈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갓도 잘 어울리고 수염도 잘 어울리고 한복이며 자세, 말투까지. 선비 특유의 톤이 있는데 그걸 그대로 하더라. 정말 엄청 잘 해줬다. 그리고 진짜 잘생겼다. 원래 그렇게 잘생겼는지 몰랐는데, 이번 영화에서 정말 잘생긴 거다. 감탄한 순간이 많다.”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을 연기한 설경구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을 연기한 설경구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시대극이지만, 현재까지 관통하는 가치, 메시지를 담아내기도 했는데.
“보는 사람의 차이이지 감독이 뭔가 의도하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도를 해서, 모두가 그 의도대로 읽는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다. 똑같은 걸 놓고도 각자 다르게 보는 것이 개인차이지 않나. 단 대중을 상대로 하는 영화이다 보니, 만드는 사람이 공부를 어렵게 해서 보여줄 때는 쉽게 보여줘야 한다. 자기가 어렵게 공부했다고 어렵게 보여주는 것도 이상하고, 쉽게 공부해서 어렵게 보여주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나 역시 어려웠다. 워낙 어려운 소재였다. 제일 중요한 대사인데 나조차 모르겠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전달된 건 배우가 한 거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그 인물의 감정, 생각이 납득이 된다. 배우가 다 고민해서 만들어낸 거다. 칭찬받아 마땅하다. 연기력이 좋다는 건 기술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연기에 임하는 자세가 좋고, 충분히 소화를 해서 길게 전달해낸 다는 거다. 그만큼 공부를 해야 하는 거겠지.”

-‘박열’ 후미코, ‘변산’ 선미 그리고 ‘자산어보’ 가거댁까지 여성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이 눈에 띈다. 특히 ‘씨만 귀한 줄 알고 밭 중한지 모른다’는 가거댁의 대사는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그 시대 여인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과 그것을 현시대에 맞는 메시지로 연결한 점이 좋았고 재밌었는데.
“가거댁은 실존 인물이다. 이름은 다르지만, 약전이 흑산에서 아들을 둘 낳은 건 다 실화다. 가거댁의 대사 역시 실제 자료에 기록된 걸 그대로 갖고 온 거다. 200년 전 유배를 가다가 강진의 주막에 들렀는데, 주막 할머니가 그 말을 한 거다. 그걸 가거댁의 대사로 바꾼 거다. 지금의 여성관을 그때 그 시절 시골의 주막 할머니가 한 거다. 가거댁은 여성의 포용력을 보여준다. 그 힘은 이정은에게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준익 감독이 극장가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이준익 감독이 극장가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실제 정약용이 지은 한시를 인용한 것도 인상 깊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울리는 시를 찾은 건지 특정 시를 담기 위해 만든 장면도 있는지 궁금하다.
“정약용이 흑산도로 유배 가는 형 정약전과 나주 율정에서 헤어질 때 지은 시 ‘율정에서의 이별’은 꼭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약용과 약전이 유배를 가며 안타까운 이별을 하는 장면을 담았고, 두 번째로 꼭 영화로 담아내고 싶었던 시는 ‘애절양(哀絶陽)’이다. 그것은 시로 안 넣고, 장면으로 만들었다. 군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현실을 노래한 시인데, 그 대목을 장면화한 거다. 어떤 관객은 그 장면을 불편하다고 느낄 수 있고,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 장면을 넣어야 했다. 그 이유는 정약용이 ‘시대를 아파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가장 적합한 시가 ‘애절양’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예 장면으로 만들어버렸다. 창대와 이강회의 시 배틀 장면은 ‘독소’라는 시를 나중에 찾아낸 거다. 정약용 앞에서 창대가 이강회를 실력으로 눌러야 하는 시를 찾다가 발견하게 됐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고 있고, 극장 상황이 좋지 않다. 이런 시국에 개봉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도 있을 것 같은데.
“잠잠해질 거 같더니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계속 이어져서 걱정스럽다. 그런데 지금 극장에서 방역을 철저히 잘 지켜오고 있어서 조심스럽게 개봉 날짜를 잡게 됐다. 다행히 ‘미나리’가 큰 역할을 해주고 있잖나. 완전히 무너져가는 극장을 일으켜줬다. 그 뒤를 이어 ‘자산어보’가 다음에 나올 영화들을 위해 디딤돌이 되면 좋은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극장도 살려야 하고, 한국영화도 살려야 하고, 코로나19도 이겨내야지.”

-열네 번째 작품이었는데, 그동안 연출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온 것 혹은 꼭 지키고자 한 것이 있다면.
“제작비를 맞추자. 스케줄을 맞추자. 제작부의 스케줄을 반드시 지키자. 열네 편을 다 지켰다. 한 편도 어긴 게 없다. 예술보다 약속이 더 중요하다. 예술 한답시고 약속 어기는 거 난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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