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연우진이 영화 ‘아무도 없는 곳’(감독 김종관)으로 관객 앞에 선다. /엣나인필름
배우 연우진이 영화 ‘아무도 없는 곳’(감독 김종관)으로 관객 앞에 선다. /엣나인필름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영화 ‘아무도 없는 곳’(감독 김종관)은 어느 이른 봄, 7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소설가 창석(연우진 분)이 우연히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 그들이 들려주는 길 잃은 마음의 이야기와 창석이 쓰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영화 ‘최악의 하루’(2016), ‘더 테이블’(2017), ‘조제’(2020) 등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페르소나’를 통해 섬세한 연출력과 아름다운 영상미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온 김종관 감독의 신작이다.

‘아무도 없는 곳’은 주인공 창석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익숙한 듯 낯선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듣는 이야기로 극이 완성된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흘러가는 독특한 구성을 띠는 것.

이에 주로 이야기를 ‘듣는’ 창석의 역할이 무엇보다 막중했다. 많은 대사 대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했고, 그들의 이야기에 작은 표정, 눈빛만으로 ‘반응’해야 했기 때문. 연출자 김종관 감독 역시 “‘액션’보다 ‘리액션’이 중요한 영화”라고 소개한 바 있다. 

김종관 감독은 영화 ‘더 테이블’에서 한차례 호흡을 맞췄던 배우 연우진에게 창석이라는 캐릭터의 옷을 입혔다. 그리고 연우진은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각 인물들의 사연을 아우르며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았다. 각자가 스스로의 빛을 낼 수 있게 창석 그 자체로 스크린 안에 그저 존재했다.

데뷔 12년 차 배우 연우진에게도 김종관 감독과 함께 한 시간은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다. 인생에 대한 태도, 작품을 바라보는 진솔함과 배우의 마음가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고, 잊었던 ‘초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김종관 감독과 다시 한 번 호흡한 연우진. /엣나인필름
‘아무도 없는 곳’으로 김종관 감독과 다시 한 번 호흡한 연우진. /엣나인필름

개봉에 앞서 <시사위크>와 만난 연우진은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미래를 맞이할 것”이라는 남다른 각오를 밝혀 그의 앞날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완성된 영화는 어땠나.
“먹먹하면서 여운이 짙었다. 생각할 지점이 많더라. 김종관 감독님만의 색깔과 느낌이 잘 표현된 것 같다. 특히 시나리오와 완성된 영화는 느낌이 다른 부분이 많았다. 감독님의 글 속에는 사실 여백이 주는 어려움과 공허함이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여백, 사이의 느낌도 다른 분위기로 꽉꽉 채워졌더라. 생각할 여지를 만들어주는 포인트를 잘 살려낸 것 같아 좋았다. 영화적 해석은 각자 자유로울 수 있으나, 감독이 전하고자 한 마음의 의도는 똑같이 닿지 않을까 생각한다.”

-창석이라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오히려 비워내는 과정을 보냈다고.
“창석이 주로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라, 나다운 모습이 많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부분을 배제시키기 위해 내 본연의 것들을 지우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을 비우게 되더라. 특히 김종관 감독님의 작품 같은 경우 독특한 문어체가 특징인데, 꾸며낸 듯한 연기를 하면 더 어색하게 보일 수 있다. 캐릭터가 명확히 잡혀있지 않으면 튈 수 있고 어색하게 보일 수 있어서 준비 과정에 있어서 캐릭터를 조금 더 순수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했고, 순수한 마음으로 진실 되게 연기하려고 했다.

우리 영화는 창석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기 보다 각자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색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분들의 색을 빛낼 수 있게 최대한 선을 넘지 않으려고 했고, 무미건조하게 캐릭터에 임했던 것 같다. 창석이 갖고 있는 개인적인 아픔이나 과거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에 대한 표현 자체를 최대한 억누르려고 했다. 상실과 창작의 고뇌, 고민들이 감정을 잡아먹고 있는 인물인데, 그런 감정이 크게 자리 잡고 있지만 그것을 거두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듣기 위해, 남의 색을 잘 표현해낼 수 있는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색으로 캐릭터를 잡아가려고 노력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설가 창석을 연기한 연우진 스틸컷. /엣나인필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설가 창석을 연기한 연우진 스틸컷. /엣나인필름

-김종관 감독은 어떤 디렉션을 줬나.
“사실 감독님과 작품 얘기는 그렇게 깊게 하지 않는다. 하하. 감독님의 배우를 다루는 방식이나 현장을 이끌어가는 방법이 내게도 독특한 경험이었다. 감독님은 본인과 만나는 시간을 계속 만듦으로써 그 분위기에 알게 모르게 젖어들게 하는 것 같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의 분위기에 맞춰지더라. 묘한 경험이었다. 말로 캐릭터를 형언하지 않아도, 그 자체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입혀주는 과정이었다.”

-김종관 감독과 ‘더 테이블’에 이어 다시 만나게 됐는데.
“둘 다 말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다. 단둘이 있어도 말을 꺼내거나 그러지 않는데, 그 침묵이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서로 뭔가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전해지는 온정이 있다. 나는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깊게 알고 지내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김종관 감독님과는 마음의 벽도 허물어지는 것 같고, 감독과 배우의 만남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조금 더 알고 싶고 함께 해내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더 테이블’ 이후 다시 작업하자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올진 몰랐다. ‘더 테이블’ 때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답례 차원에서 이번에는 내가 뭔가 기운을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는데, 이번 작품도 오히려 내가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 마음의 빚을 더 진 느낌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미영을 연기한 이지은(아이유)과의 호흡이 인상적이었다. 어땠나.
“미영이 대화하다 말고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이 다 했다고 생각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에서 그 에피소드를 통해 말하고 싶은 주제가 다 표현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미영을 연기한 이지은은 처음부터 그냥 미영으로 있어줬다. 그래서 내게 이지은 하면 미영만 떠오른다. 인생의 굴곡을 겪어온,시간의 흐름과 내재돼있는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에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작품과 연기를 생각하는 데 있어 나보다 더 깊게, 나아가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연기 호흡을 맞춘 윤혜리(왼쪽)과 연우진 스틸컷. /엣나인필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연기 호흡을 맞춘 윤혜리(왼쪽)과 연우진 스틸컷. /엣나인필름

-창석은 미영을 시작으로 유진(윤혜리 분)‧성하(김상호 분)‧주은(이주영 분)과 만나 다른 이야기를 듣고, 들려준다. 각 인물을 대할 때 창석의 모습에 변화를 주고자 했나.
“어느 하나 계산 없이 임했다. 날것 그대로 받아들여서 순수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도전이기도 했다. 상황 자체를 처음 맞이한다는 느낌에 포인트를 두고 연기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는 감정을 순간순간 맞이할 때가 많았다. 특히 유진과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신비한 기운에 휩싸였다. 내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고요함을 느꼈다. 영화를 찍는 내내 감독님의 의도대로 비치길 바랄 뿐 뭘 하려거나 하지 않았다. 이 신에서 내 연기적 의도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은 안 했다. 순수하게 상대방의 얘기를 듣는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다는 생각만 갖고 촬영에 임했다.”

-그런 접근 방식이 김종관 감독 고유의 특징일까.
“감독님만의 연기 디렉션 중 독특한 방법 중 하나인 것 같다. 배우에게 조금은 생소할 수 있으나 그 순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을 길러주는 것 같아서, 본질을 탐구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연우진이 더욱 활발한 활동을 예고했다. /엣나인필름
연우진이 더욱 활발한 활동을 예고했다. /엣나인필름

-연기적인 면에서도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다. 대화로만 이야기가 진행되고, 느린 호흡으로 잔잔하게 끌고 가면서 덜어내는 연기를 해야 했는데, 어떤 매력과 어떤 고충이 있었는지.
“바쁘게 지나온 일상 속에서 쉬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마냥 생각 없이 쉬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지금의 것들에 대해 깊게 응시하는 듯한 시간이 있었다. 본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연기에 대한 본질과 내 인생에 대한 물음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을 어떻게 연기해야겠다는 생각도 있겠지만, 그걸 넘어서 내가 앞으로 연기를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갖고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숙제가 생기기도 하고, 인생을 어떻게 하면 가치 있게 나답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 것 또한 감독님과 만나는 시간이었다. 전에는 이런 것들을 올곧게 여유를 갖고 생각할 시간이 없었는데, 감독님과 작업하면서는 알게 모르게 이런 생각들이 들더라. 조금 더 순수하고 곁가지를 쳐내고 진실 되게 연기에 다가가는 방법을 찾으라는 숙제를 내준 시간이었다.”

-다음 작품을 함에 있어서도 영향이 있겠다.
“맞다. 연기자로서 늘 어떤 고민을 하고 있지만, 지금 하는 고민들을 잘 메모하고 싶다. 정답이 아닐지언정,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고민이 앞으로 묻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고, 지금의 시간들이 헛되지 않게 잘 담아내서 연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다.”

-배우로서 뿌듯함을 느낄 땐 언제인가.
“사실 그런 것들에 대한 만족감을 어느 정도 잊고 살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이번 작품을 하게 되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초심이라고 할까. 그전까지는 내가 하는 일이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했고, 나태해지기도 하고 도태되기도 하고 그 속에서 안주하면서 지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고 나서 길 잃은 마음들이 다시 한 번 초심을 잡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감독님에게 감사하기도 하고, 뿌듯함도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았다. 관객도 이 영화를 보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답답하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그들에게 작지만 위로가 될 수 있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고,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함을 느낄 것 같다.”

-초심을 떠올리는 시간이 됐다고 했는데, 연우진의 초심은 무엇이었나.
“사람들의 마음에 감정의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이 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기를 잘하든 못하든 간에 순간의 노력들을 책임감 있게 받아들이자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어느 순간 열정이 식어버릴까 고민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마음들을 다잡고 연기를 대하는 순수한 자세와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불러일으킨 작업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일로만 생각해서 피로감이 있었던 것 같다. 앞만 보게 되고 이런 생활들에 익숙해지다 보니 감사한 것들에 대해 당연하다고 느끼게 되고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데 감독님과 작품을 하게 되면서 마음의 힐링이 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다시 고삐를 죄는 느낌으로 미래를 맞이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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