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설경구가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로 돌아왔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배우 설경구가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로 돌아왔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몇 년 전, 한 영화제 시상식에서 이준익 감독과 만난 설경구는 “준비된 대본이 있으면 달라”고 청했다. ‘동료’로서 친분에 의한 편안함이자, ‘연출자’ 이준익 감독을 향한 믿음에서였다. 그리고 얼마 후 이준익 감독으로부터 받은 시나리오 한 편은 그의 마음을 울렸다. 따뜻하면서도 아프고, 아름다우면서도 여운이 짙은 이야기가 가슴에 콕 하고 박혔다. 그렇게 설경구는 ‘자산어보’, 그리고 정약전과 만났다.

이준익 감독의 열네 번째 연출작 ‘자산어보’(감독 이준익)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설경구 분)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 분)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장르와 역할을 불문하고, 선 굵은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아온 설경구는 극 중 정약용(류승룡 분)의 형이자 조선시대 학자 정약전 역을 맡아 데뷔 28년 만에 첫 사극에 도전했다. 약전은 명망 높은 가문의 양반이지만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

설경구는 수염, 상투와 갓, 한복 등 외적 비주얼은 물론, 걸음걸이와 자세, 목소리 톤까지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해냈다. 여기에 호기심 많은 학자의 엉뚱하면서도 순수한 모습부터 백성을 위한 지식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찰하는 참된 스승의 모습까지 폭넓게 아우르며 탄탄한 연기 내공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이준익 감독 역시 “설경구가 연기한 그대로가 정약전으로 다시 살아났다”고 극찬했을 정도로, 설경구는 정약전 그 자체로 존재했다. 

최근 화상 인터뷰를 통해 <시사위크>와 만난 설경구는 이준익 감독의 칭찬에 대해 “배우의 장점을 과대포장해 준 것”이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다시 한 번 사극에 도전해보고 싶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또 정약전을 두고 “자신의 허물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라며 ‘참된 스승’의 의미를 되짚었다.  

‘자산어보’로 첫 사극에 도전한 설경구.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로 첫 사극에 도전한 설경구.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그동안 제안도 많았을 텐데, 첫 사극으로 ‘자산어보’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결정적 이유는 이준익 감독님이었다. 제안을 거절했을 때 감독이 싫어서였다는 뜻은 아니고, 조금 있다 조금 있다 하던 게 지금까지 오게 됐다. 이준익 감독님에게 대본 준비한 거 있으면 달라고 했는데, 그게 마침 사극이었다. 현대극이었어도 했을 것 같다. 자연스럽게 합이 맞았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 (사극을) 하니까 더 좋은 것 같다. 또 (‘자산어보’가) 기존 사극과는 차별성이 있어서 더 좋았다. 큰 사건이 사실 없다. 소소한,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그런 이야기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좋았다. 고되고 슬픔도 있지만, 즐겁고 정도 있고 따뜻해서 좋았다.”

-사극을 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나. 반면 재미를 느낀 부분은 무엇인가.
“걱정이 제일 큰 어려움이었다. 감독이 그리는 약전과 다른 모습이 나올까 걱정했다. 겁 없이 하겠다고 했는데 막상 수염을 붙이고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는데, 양반 같지 않고 어울리지 않다고 하면 낭패잖냐.  이준익 감독님 배우들에게 장점을 더 과대포장해서 말해주는 게 있는데,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갖게 해줬다. 연기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신감 때문에 할 수 있었다. 익숙해지니까 재미가 있더라. 그래서 사극을 한두 편 더 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퓨전사극 말고, 그 시대에 맞는 사극을 컬러로 표현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정약전의 사상이 당시엔 위험하다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진보적인 성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생각이나 선택에 대해 어떤 생각과 공감을 했는지.
“그 시대에서 봤을 때 약전의 사상과 생각이 위험한 생각이고, 지금은 당연한 거다. 약전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그런데 그 시대 양반과는 다른 인물이었던 것 같다. 약전이 약용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해서 유배지를 바꾼다. 그 시대에 양반도 상놈도 필요 없고, 임금도 필요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말을 뱉을 수 있다는 게 참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약용은 성리학 안에서 수많은 책을 썼다. 임금의 품 안에서 좋은 관료가 돼 백성을 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책을 썼다. 반면 약전은 <자산어보>라는 책을 썼다. 만약 약전이 갖고 있는 생각을 책으로 썼다면 아마 약용도 위험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약전은 사물처럼 명료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활용가치에 대해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과의 관계도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흑산도 주민과 잘 섞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부드러움 속에 강골 같은 느낌을 간직한 게 약전의 매력이지 않았나 싶고, 주변 모든 이들을 위해 글을 쓸 수 없었던 아픔까지 간직한 복합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을 연기한 설경구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을 연기한 설경구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했지만, 이준익 감독은 ‘조선 선비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완성했다’고 극찬했다. 선비로서의 분위기를 담아내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 궁금하다.
“고민해서 나온 건 아닌 것 같다. 그동안 사극을 많이 봐서 그런지 도포를 입고 수염을 붙이고 갓을 쓰니 자연스럽게 되더라. 뒷짐도 지고 턱도 들고 이전에 봐왔던 전형적인 양반의 모습을 표현했다. 굳이 다른 모습이 없을까 고민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편하게 했다.” 

-이준익 감독과 ‘소원’(2013) 이후 재회했다. 이번 작업은 어땠나.
“일단 (이준익 감독이) 말씀을 정말 잘 하시는데, 말한 걸 까먹는다. 준비되지 않은 거라는 거다. 상황에 맞게 대화를 풀어내는 재주가 어마어마하다. ‘소원’ 때와 똑같은 모습도 정말 좋았다. 항상 변하지 않는다. 모든 배우를 똑같이 대해주고, 포장해서 잘 말해주고 단점은 묻어둔다. 스태프 하나하나 다 관심을 갖고 대한다. 호기심 많은 소년 같다. 그런데 일할 때는 정색하고 단호할 땐 단호하다. 현장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류승룡이 다른 작품 때문에 밤을 새고 촬영하러 와서도 이준익 감독님의 현장은 항상 행복한 것 같다고 했을 때, 최원영(정약종 역)이 지금까지 드라마나 영화를 찍으면서 ‘자산어보’ 현장이 가장 행복했다고 했을 때. 그게 이준익 감독의 현장인 것 같다.”

-창대 역에 변요한을 직접 추천하기도 했다고.
“원래 변요한과 그렇게 친분이 있진 않았다. ‘감시자들’에 같이 출연했지만, 호흡을 맞춰보진 않았다. 이준익 감독님이 창대를 찾을 때 나도 모르게 변요한이 생각났다. 낯가림이 심하고, 그런데 또 좋고 싫은 게 분명하고, 나와도 다른 듯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변요한이 생각났던 것 같고, 촬영하면서도 창대구나 생각을 들었다. 이준익 감독님도 촬영 내내 ‘그냥 창대’라고 했다.”

장르 불문 선 굵은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고 있는 설경구.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장르 불문 선 굵은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고 있는 설경구.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변요한이 설경구의 좋은 점을 말하려면 날이 샌다고 하더라. 함께 작업한 후배 연기자들과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냥 동료로 대해서 편한 건가. 일단 만나면 무조건 형이라고 부르라고 한다. 처음엔 부담스러워하는데 익숙해지면 뭐. 임시완(‘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에서 호흡)도 불편해하다가 지금까지도 형이라고 한다. 젊은 모든 배우한테 형이라 부르라고 하는데, 그러면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 선배로서 대하지 않고, 나도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고 변요한도 가까이 와주려고 노력했다. 선배가 아닌 동료, 친구인 것 같다. 영화를 같이 하는 친구.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약전과 가거댁과의 로맨스도 재미 포인트였다. 가거댁 역의 이정은과 대학 동문이기도 한데, 로맨스 상대로 만난 소감은.
“최고의 로맨스 상대였다. 일단 상대배우가 편하니까, 편함에서 오는 장점이 있었다. 이준익 감독이 큰 틀을 잡아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장난하면서 편하게 접근했다. 쑥스러워 하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약전의 모습 갖기도 했다. 그 (가거댁과 약전의 로맨스를 보여주는) 장면을 더 길게 찍었는데 이준익 감독님이 시간의 압박 때문에 줄인 것 같다. 다 붙여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짧은 게 조금 아쉬웠다.”

-정약전을 통해 참된 스승, 진정한 어른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는지.
“약전은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모습도 있고, 단호한 모습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참된 스승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꼰대’ 같은 스승은 싫어한다. 자신의 허물을 봐야 하는데, 자기의 허물은 뒤에 숨긴 채 꼰대의 냄새가 풍기는 스승은 좋은 스승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허물도 과감하게 꺼내 보이고 나도 고칠 것이니 같이 해보자는 스승이 참된 스승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약전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창대에게 솔직하게 알려달라고 한다. 나도 도와줄 테니 네가 내 스승이 되라고 말하는 약전의 모습이 창대에게 큰 스승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반대로 창대도 약전에게 스승이었다. 나이가 많아야 스승은 아니다. 때로는 젊고 어린 사람도 나이 많은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배울 것도 많다. 나와 다른 건 다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산어보’가 지닌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선 색감이다. 흑백영화라고 구분 짓는 것보다, 지금 그려지는 색깔이 ‘자산어보’의 색인 것 같다. 기존 사극과 다른 점이 아닌가 싶다. 또 섬이라는 배경에서 오는 것도 ‘자산어보’만의 힘이 아닐까 싶고, 큰 사건이나 이야기가 아닌 것도 좋다.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관심을 갖지 않은 데서 출발해 깊은 여운을 준다면, 그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자산어보’는 즐겁고, 희망이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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