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임종을 앞둔 늙은 스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제자를 불렀다. 스승은 자신의 입을 벌려 제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내 입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버리고 혀는 부드러움 덕분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 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 이제는 더 이상 너에게 가르쳐줄 것이 없구나. 명심하거라."

15년 전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을 읽다가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문장이 그냥 좋아서 공책에 적어놓았던 늙은 스승과 제자의 대화일세. 그땐 아직 노자의『도덕경』을 공부하지 않았던 늙은 스승의 가르침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네. 그래서 저 대화의 두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 하지만 쉰 살이 넘어 『도덕경』과 장자의『장자』공부를 하면서 알았네. 저 대화에서 ‘이는 없어져도 혀는 남아 있다’는 ‘치망설존(齒亡舌存)’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는 걸. 그리고 저 대화의 출처는 중국 전한(前漢) 말에 유향(劉向)이라는 사람이 만든 고대의 제후나 선현들의 행적이나 일화를 수록한 설화집《설원(說苑)》의 <경신(敬愼)>편이고, 두 주인공은 노자의 스승 상창(常摐)과 노자라는 걸.

총 81장으로 이루어진 『도덕경』의 중심 주제 중 하나는 ‘유약승견강 柔弱勝堅强,’ 즉 유약이 견강을 이긴다는 거네. 그래서 부드러움의 힘을 강조하는 장들이 많지. 그 중 내가 자주 읽고 경계로 삼는 장이 제 76장이야. 오늘은 이번에 새로 나온 최진석 교수의 『나 홀로 읽는 도덕경』번역으로 함께 읽어보세.

“사람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지만/ 죽으면 뻣뻣해진다./ 만물 초목도 살아 있으면 유연하지만/ 죽으면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뻣뻣한 것은 죽어 있는 무리이고/ 부드러운 것은 살아 있는 무리이다./ 이런 이치로 보면/ 군대도 견강하면 패하고/ 나무도 강하면 부러진다./ 강대한 것은 하위에 처하고/ 유약한 것이 상위에 처한다.”

자네나 나처럼 고희를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감나는 말 아닌가? 나이 들면서 몸이 점점 유연성을 잃고 뻣뻣해지고 있으니 저런 글 읽으면 좀 우울해지는 것은 사실이야. 그래도 모든 생명체들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니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사람뿐만 아니라 식물들도 어렸을 땐 부드럽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뻣뻣해지네. 그래서 봄에 나는 어린순만 나물로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이 많지. 게다가 사람이든 식물이든 죽으면 더 단단하고 뻣뻣해지네. 그래서 노자가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어 있는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게 살아 있는 무리라고 한 거야.

《도덕경》 제76장은 강함을 경계하고 있는 장일세.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기는 자연의 이치를 삶의 영역에 적용하고 있는 장이야. 노자는 ‘군대가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이고 만다.’는 말로, 권력이든 금력이든 무력이든, 힘을 가진 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네. 무엇이든 너무 강하면 부러지고 만다는 것을. 부드럽고 유연해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더불어민주당의 보궐선거 참패 원인들에 관한 말들이 많지? 집권 여당의 정책적 무능과 책임 회피, 조국 사태로 드러난 위선과 내로남불, 독선과 오만, 몰염치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있지만 정부여당의 유연성 상실도 큰 원인이었던 것 같네. 사람이든 조직이든 부드러움과 유연성을 잃으면 더 단단해지고 뻣뻣해질 수밖에 없어. 위성정당 만들어 연동형비례대표제를 무력화하거나 당헌과 당규까지 고쳐가면서 재보선에 후보를 내는 자칭 촛불정당이 많은 사람들 눈에는 기득권을 타파하는 개혁정당이 아니라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으로 보일 수밖에. 사람이든 조직이든, 아니 사상이나 이념까지도 죽음에 가까울수록 더욱 더 단단하게 굳어진다는 것을, 부드러움이 결국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을 잊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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