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는 스토리에 치중돼 볼거리가 빈약하다는 것은 옛말이다. 다만 비약적인 기술적 발전 이면에는 업계 내 관행처럼 이어져온 장시간 노동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픽=시사위크 

시사위크=엄이랑 기자  “국내 CG업체와 해외 유수 업체들 사이 기술격차는 상당히 좁혀졌다고 본다. 그에 반해 업계 전반의 노동실태는 개발도상국에 비견해도 무리 없는 수준이다.”

한국영화는 스토리에 치중돼 볼거리가 빈약하다는 것은 옛말이다. 화려하면서 실재감 있는 CG(Computer Graphics)가 필수인 액션·재난·판타지 등 장르 영화를 비롯해,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영화도 국내 CG업계의 기술력으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거장의 반열에 오른 봉준호 감독이 ‘괴물(2006)’을 준비할 때 CG업체 섭외가 여의치 않아 고심했다는 발언을 생각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 할 수 있다. 

단기간 이뤄낸 기술적 발전의 이면에는 업계 내 관행처럼 이어져온 장시간 노동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 2019년 초 국내 한 유력 CG업체에서는 과로사로 의심되는 사망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한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자신의 집에서 사망한 CG작업자는 사망 전 1주일간 약 73시간, 1일 평균 14시간30분 가량을 일했던 것으로 알려져 세간에 충격을 안긴바 있다. 

지난 2018년 CG업계 노동실태 관련 청원글 캡처.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갈무리

◇ 과도한 작업량, 수차례 수정작업으로 잇따르는 ‘야근’ 

CG업계의 노동실태는 지난 2018년 2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너무나 열악한 CG(2D/3D) 영상 제작 노동자들의 근로환경 개선’이라는 제목의 게시글로도 알려진 바 있다. 한 달여 동안 진행된 청원에는 총 5,357명의 동의가 이뤄졌다.  

해당 게시글은 “과로에 시달리는 IT노동자들의 실태가 알려지고 있지만 너무나 열악한 CG, 미디어, 영상 산업 노동자들의 실태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했다”며 청원의 계기를 밝혔다. 이어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무리한 근무 시간 △무리한 스케줄 △노동력에 비해 턱없이 적은 임금 △노동법 없는 기업문화 △갑과 을인 업계구조 등을 꼽았다.

청원 이후 CG업계의 장시간 노동실태에 관한 연구가 발표되기도 했다. 지난 2018년 9월 서동희 남서울대학교 교수가 발간한 보고서에 CG업계 종사자 11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47.8%(54명)가 주 52시간 이상 노동을 한다고 응답했으며, 12.4%(14명)만이 주 40시간 노동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8년 말 입사해 올해 초까지 영화 CG업계에 몸담았던 한 작업자(이하 A씨)는 2022년 현재 업계의 노동환경은 사망사고가 발생했던 당시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A씨에 따르면 재직했던 2개 업체에서 연장근무가 이뤄질 시 평균 노동시간은 15시간이었다. 여기에 점심·저녁 등 두 차례 식사 및 휴게시간이 포함되면 17시간에 이른다.

A씨 설명에 따르면 작업은 오전 10시에 출근해 개인에게 할당된 작업 내용을 확인한 후 리무브(화면 내 불필요한 인물, 물건, 상표 등을 지우는)를 진행하고 오후 1~2시 사이 점심식사를 한다. 이후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작업을 진행한 후 8시에 저녁식사를 마친 뒤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이어가는 형태다.

A씨는 “팀장급에서 야근을 지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작업자 본인이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며 “출근 직후 할당받은 작업량 자체가 8시간 내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많을뿐더러, 대다수 작업의 마감 일정도 촉박하다. 작업자들도 연이어진 야근에 불평 정도만 있을 뿐 해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다른 영화 CG업계 현직 작업자 2명의 의견도 A씨와 동일했다. 본지와 만난 늦은 밤에도 작업한 영상을 전송하고 있던 작업자들은 다른 CG업체에서 전달된 이른바 ‘재하청’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한 작업자는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언급하며 “의뢰 당시 간단한 작업이라고 전해 들었지만 실상은 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여기에 재하청 작업이라 마감기한도 짧은 편”이라며 “이를 발주 업체에 항의하지만 정으로 호소하는 이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해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씁쓸하다”라고 말했다.

2000년대 초부터 광고 CG업계에 몸담고 있는 작업자(이하 B씨)의 경우 장시간 노동의 주원인으로 과도한 작업량 대신 촉박한 수정일정을 꼽았다. 매체에서 발생하는 차이인데, 120분 내외의 분량으로 상당량의 샷(Shot, 전체 영상을 구성하는 개별 영상을 지칭하는 단위)에서 작업이 필요한 영화와 달리 상영시간이 15~30초 내외로 짧은 광고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B씨는 “광고에서 CG의 경우 영화와 비교해 분량이 적어 실제 작업시간 자체는 짧다. 대개 8시간 정도면 광고 1편에 필요한 CG작업은 마무리된다”며 “광고주와 업체를 연결하는 대행사에서 언제 올지 예상할 수 없는 수정요청이 장시간 노동의 주 원인”이라고 말했다.

B씨의 설명에 따르면 광고에서 CG작업은 대행사에 1차 결과물을 제출한 뒤 피드백을 요청하고, 광고주의 의견을 반영해 수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수정요청은 대개 바로 오지 않고 늦은 밤이나 새벽에 온다. CG업체는 수정사항을 즉각 반영해 수정된 결과물을 보내야 하기에 이른바 ‘5분대기조’처럼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경우가 상당수라는 설명이다.

B씨는 “광고주나 대행사가 바쁜 건 이해하지만 늦은 밤이나 새벽에 수정사항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에 결과를 보고해야 하는 대행사의 업무 특성상 이른 아침에 받기를 원한다”라며 “작업자들은 들어온 수정사항을 곧바로 반영해야 하고, 업체 입장에서도 수정작업 개시 일정이나 작업에 필요한 시간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CG작업자들은 포괄임금 명시로 늘어나지 않는 비용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입을 모았다. /픽사베이

◇ “‘포괄임금’ 명시로 늘어나지 않는 비용이 문제의 근원”

영화 CG작업 또한 수정작업이 장시간 노동의 원인 중 하나다. 영화의 경우 결과물에 대한 감독(연출)의 모니터링이 잦은 편이다. 완성에 대한 기준은 감독 개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영화제 출품 마감일이나, 개봉 직전까지도 수차례 수정 작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A씨는 “결과물에 대한 최종 권한은 감독에게 있고 작업자들은 요청에 따라 수정을 계속해야 하는 구조”라며 “수차례 수정을 위해 야근을 지속해도 작업자들의 임금은 추가되지 않는다. 업체 입장에서도 작업 퀄리티가 좋다면 자사의 기술력으로 내세울 수 있기에 사실상 방관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작업자들은 모두 포괄임금을 장시간 노동의 근원으로 꼽았다. A씨가 2개 업체와 작성한 계약서를 확인해본 결과, 월급에 연장수당이 적게는 10만원(10시간)에서 많게는 60만원(44시간)이 포함돼 있었다. A씨는 이러한 점이 업체가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근거가 된다고 지적했다.

A씨는 “결국은 돈이다. 회사가 작업 인원을 고려하지 않고 다량의 작업을 동시다발로 수주하는 것이나, 무한정 수정 요청이 반복돼도 이를 조율하지 않는 것은 매일 같이 야근을 반복해도 늘어나지 않는 비용 때문”이라며 “결국 문제의 핵심은 계약서에 명시된 포괄임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B씨의 경우 포괄임금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업체 운영진들의 자성을 촉구했다. 

B씨는 “(장시간 노동 문제는) 업계에 들어온 직후부터 지속된 고민이다. 일한 시간에 맞게 임금이 지급되는 게 우선”이라면서도 “무엇보다도 CG작업자와 대행사 사이에서 작업일정을 조율하는 직책의 역할이 크다. (CG작업에) 이해도가 높은 경력자가 필요하지만 이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는 업체는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 참고자료


- 전·현직 영화, 광고 등 영상업계 CG작업자 인터뷰.

 

- 이준희 한겨레 기자 ‘밤샘·새벽 퇴근, 그날 아침 또 출근… ‘주 73시간’ 일한 영화 노동자 사망’ (2019년 2월 7일 보도)

 

- 서동희 남서울대학교 영상예술디자인학과 교수 ‘CG 콘텐츠 산업 종사자의 직업 특성에 따른 직무 요인과 만족도 연구’ (2018년 9월 게재)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