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8 21:53
[김재필 '에세이'] H에게- 죽은 사자성어 ‘처염상정(處染常淨)’
[김재필 '에세이'] H에게- 죽은 사자성어 ‘처염상정(處染常淨)’
  • 김재필 사회학 박사
  • 승인 2022.06.27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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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여름에 피는 꽃들 중에서는 연꽃을 가장 좋아하네. 다행히 시흥 연꽃테마파크가 집 가까이 있어서 자주 다녀오지. 며칠 전에 갔더니 홍련과 백련들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하더군. 향원익청(香遠益淸)이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멀리서 바라보고만 왔네. 사실 연꽃은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보다 좀 떨어져서 봐야 더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꽃일세. 또 연꽃은 활짝 핀 모습보다 아직 만개하지 않은 봉오리가 더 아름다운 꽃이야. 둥근 꽃봉오리를 보면서 활짝 피었을 때의 꽃모습을 마음으로 그려보는 여유를 갖고 봐야 연꽃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지. 꽃 보는 마음보다 꽃 그리는 마음이 더 절절하다(想花心比見花深)는 옛 시인의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이 나에게는 연꽃일세.

연꽃은 옛날부터 심오한 종교적 의미를 가진 신성한 꽃이었네. 특히 불교에서 연꽃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상태, 즉 부처를 상징하는 꽃이야. 불교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간의 네 가지 덕성 즉 향기로움, 순수함, 부드러움, 아름다움을 모두 가진 꽃이 연꽃이라고 믿지. 그래서 절에 가면 여기저기 연꽃 천지야.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부처님도 보이고, 연꽃 위에서 뛰놀고 있는 어린 동자들도 보여. 불상의 받침대와 문살도 연꽃 모양이고, 사찰의 조실 스님이 머무는 방은 염화실(拈花室)이라고 불러.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라는 말은 들어봤지? 석가모니가 인도 영취산 대중 집회에서 설법하다가 연꽃 한 송이를 들어보이자 10대 제자 중 두타제일(頭陀第一)로 불리는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는 일화에서 나온 말이야. 깨달음에 이르는 진리의 전달은 말보다는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가능하다(이심전심)는 뜻이지. 여기서 선(禪)의 시작인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도 나왔어. 궁극의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야.

진흙에서 자라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고결한 자태를 뽐내는 연꽃을 보면서 처염상정(處染常淨)을 생각했던 사람들은 불교도만이 아니었네. 유학자들도 연꽃을 군자의 꽃으로 흠모했지. 중국 북송 시대의 유학자 주염계는 <애련설(愛蓮說)>에서 연꽃을 화중군자(花中君子)라고 했어. 많은 꽃들 중 가장 군자다운 꽃이라는 거야. 열 가지 꽃을 친구(十友)로 삼았던 중국 송나라 증단백(曾端伯)은 연꽃을 정우(淨友), 즉 ‘깨끗한 벗’이라고 칭했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원예서인 『양화소록』과 『화암수록』의 저자들인 강희안(姜希顏, 1417-1464)과 유박(柳璞, 1730-1787)도 소나무, 대나무, 국화와 더불어 연꽃을 고표일운(高標逸韻), 즉 높고 뛰어난 운치를 가진 1등 식물로 평가했네. 그래서 옛사람들은 못을 파고 연꽃을 피워 군자의 풍모를 보고 배웠지.

그러면 요즘 사람들은 연꽃 구경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먼저 정호승의 <연꽃 구경>이라는 시부터 읽어보세.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 게 더럽더라도/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 게 연꽃 같은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해가 질 때쯤이면/ 연꽃들이 오히려/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슬프게도 이 나라에서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가르침은 이미 죽은 사자성어가 되고 말았네. 사바세계에서 탐진치(貪瞋癡) 3독(三毒)에 물들지 않고 항상 맑고 향기롭게 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처염상정과 부처와 군자의 상징인 연꽃을 보면서도 아파트나 주식 투기로 부자가 될 꿈을 꾸거나 그렇게 해서 졸부가 된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게‘지금 여기’의 우리들 모습 아닐까. 연꽃이 피면 연꽃 구경을 나온 ‘달도 별도 새도’다 연꽃이 되는데 왜 유독 인간들만 연꽃을 보면서도 연꽃이 되지 못하고 딴 짓을 하거나 딴 생각만 할까. 그러니 연꽃이 그런 인간들 한심해서, 저들은 왜 저렇게 살까 궁금해서,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볼 수밖에. 친구야, 제발 우리만이라도, 처염상정의 근처에는 못 간다 할지라도, 끝없는 노욕으로 연꽃마저 실망시키는 사람은 되지 말자. 적어도 뭐가 부끄러운 일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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