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을 멈추지 않는 정병길 감독. /김현수 기자
도전을 멈추지 않는 정병길 감독. /사진=김현수 기자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정병길 감독은 장편 데뷔작 다큐멘터리 ‘우린 액션배우다’(2008)로 제27회 밴쿠버 국제 영화제를 비롯해,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며 데뷔와 동시에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12년 첫 극영화 ‘내가 살인범이다’로 제50회 대종상 영화제 신인감독상, 제31회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스릴러상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상 성과를 낸데 이어, 2017년 영화 ‘악녀’로 제70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돼 호평을 이끌어내면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실력파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5년 만에 선보인 신작 ‘카터’를 향한 반응도 뜨겁다. 지난 5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 ‘카터’는 공개 3일 만에 넷플릭스 글로벌 TOP10 영화(비영어)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한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등 총 90개국의 TOP10 리스트에 오르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flixpatrol) 기준 글로벌 순위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매 작품마다 예상을 뛰어넘는 상상 이상의 액션 시퀀스를 선보였던 정병길 감독은 이번 ‘카터’를 통해 동양적인 색채가 느껴지는 원테이크 액션을 완성, 지금껏 보지 못한 독창적이고 화려한 액션으로 또 한 번 액션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년 만에 선보인 신작 ‘카터’ 포스터. /넷플릭스
5년 만에 선보인 신작 ‘카터’ 포스터. /넷플릭스

“당신의 이름은 카터입니다. 절 믿어주세요.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어요.” (‘카터’ 대사 중)
 
넷플릭스 영화 ‘카터’는 의문의 작전에 투입된 카터(주원 분)가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을 되찾고 미션을 성공시켜야만 하는 이야기를 담은 리얼 타임 액션이다. 모든 기억이 지워진 채 의문의 작전에 투입된 주인공 카터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에 의지한 채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을 박진감 넘치게 담아내 글로벌 시청자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고 있다.  

‘카터’는 정병길 감독이 10년 전부터 구상한 작품이다. 최종 완고는 2년 전에 했다. 할리우드 영화 ‘존 윅’을 연출한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도 반한 시나리오였다. 지난 11일 <시사위크>와 만난 정병길 감독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느낌의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카터’의 시작을 밝혔다. 

“서울에서 북한을 찍고 중국까지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면, 그 과정을 한 테이크로 담아내면 어떨까가 시작이었죠. 북한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폭발하면 떨어지고 다시 기차를 타게 되고 어떤 위기를 맞고 그 위험에서 벗어나고 또 벗어나면서 쭉 달리는… 쇼파에서 TV를 봤는데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카터’는 오프닝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난도 액션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며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액션 마스터’로 불리는 정병길 감독이 그동안 쌓아온 액션 노하우를  모두 쏟아부은, 작정하고 만든 ‘액션 끝판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몇 장면은 다음 작품을 위해 아껴두지 그랬냐는 기자의 말에 정병길 감독은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언제 만들어질지 모르니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은 것 같다”며 웃었다. 

또 한 번 새롭고 독창적인 액션 시퀀스를 완성한 정병길 감독. /김현수 기자
또 한 번 새롭고 독창적인 액션 시퀀스를 완성한 정병길 감독. /김현수 기자

‘카터’의 다양한 액션 시퀀스는 역동적인 카메라 무빙을 통해 더욱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게 완성됐다. 특히 헬기를 직접 제작하고, 스카이다이빙 신을 실사로 담아내는 등 불가능에 도전하며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독창적이고 다이내믹한 명장면들을 탄생시켰다. 학창시절 미술을 전공했다는 정병길 감독은 “획일화된 것을 싫어하는 성향이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림을 그릴 때도 남이 안 하는 구도를 계속 잡았어요. 예를 들어 정물화를 그린다면 어떤 정물을 광각으로 당긴 것처럼 그리기도 하고, 정물 안에 들어가서 밑에서 위를 바라보는 구도를 상상해서 잡는다든가 했죠. 획일화된 것을 싫어했던 것 같아요. 절대 시험에 나오지 않을 만한 앵글, 어려운 구도로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모험을 많이 했어요. 그런 성향이 영화를 만들 때도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것 같아요. 불가능한 앵글, 구도가 많죠. 컴퓨터그래픽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거든요. 특수 제작한 카메라를 실제로 집어넣고 촬영하거나, 스턴트맨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기도 하고요.”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의 액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해온 값진 결과이기도 하다.  

“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때 ‘한국에서 이걸 어떻게 찍어, 한국은 안 돼’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닌 것 같은 거예요. 아이디어 싸움인 것 같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씩, 조금씩 해나가기 시작한 것 같아요. 남들이 안 된다고 하지만 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더 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요.” 

그렇게 다 쏟아냈는데도 정병길 감독의 머릿속은 벌써 새로운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이 ‘이제 원테이크 찍기 싫어지겠다’고 했는데, 원테이크 방식으로 또 찍고 싶은 영화가 2편이 생겼어요. 당장 다음에 찍어야 하나 그다음에 찍어야하나, 누가 하기 전에 해야 하지 않나…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꼭 찍고 싶어요.” 

제70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돼 호평을 얻은 ‘악녀’ 스틸컷. /네이버영화
제70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돼 호평을 얻은 ‘악녀’ 스틸컷. /네이버영화

“보여줄게,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악녀’ 대사 중)

정병길 감독의 원래 꿈은 화가였다. 일찌감치 미술에 재능을 발견하고 안양예고 미술과에 진학해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그러나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삼수까지 했지만 계속되는 실패에 회의감까지 들었다. 그런 그를 버티게 해준 건 ‘영화’였다. 

“노량진에 있는 재수학원에 다녔는데 학원 앞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 있었어요. 그곳으로 출근을 했죠. 2년치 학원비를 극장에 부었어요. 그때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학원에 가는 건 너무 싫은데 극장에 가면 재밌으니까 갔어요. 영화를 보고 친구들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같이 저녁을 먹고 친구들은 그날 공부한 것을 이야기하고 저는 오늘 본 영화를 이야기해 줬죠.”  

결국 미대 입시를 포기하고 군대에 갔다. 평생 해오던 미술을 접고 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고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 그에게 ‘영화’가 또 한 번 운명처럼 손을 내밀었다. (정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38선’에서 ‘영화의 동지’를 만난 것이다. 우연히 파견된 부대에서 영화감독이 꿈인 ‘영화광’ 고참을 만났고, 영화를 매개로 친해진 두 사람은 시나리오까지 완성하며 공동연출의 꿈을 키웠다. (정병길 감독의 동지는 지난해 넷플릭스 영화 ‘차인표’로 데뷔한 김동규 감독이다.)

전역 후 정병길 감독은 본격적으로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영화에 관련된 일이라면 배우든 스태프든 연출부든 뭐든 좋았다. 액션스쿨 과정도 수료했다. 그러다 혼자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사서 배우고 편집프로그램을 독학하며 영화를 찍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단번에 영화제에 출품됐다. 용기를 얻어 만든 다음 작품은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상금까지 받았다. 그 상금으로 또 다른 영화를 찍었고, 첫 장편영화 ‘우린 액션배우다’로까지 이어졌다.  

“내가 살아온 모든 인생이 다 영화에 묻어나오는 것 같고, 그중 그림이 가장 크죠. 가장 많은 고뇌와 시간을 보냈거든요. 제 10대는 그림밖에 없었고요. 사람들은 제가 29세에 영화감독이 된 걸 보고 빠르다고 놀라지만, 그게 가능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영화와 만화책, 그리고 제가 그린 그림 덕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꾼 것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훈련을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보면 늦게 감독이 된 것 아닌가요?(웃음).” 

정병길 감독이 영화 ‘악녀’ 세계관을 담은 NFT를 발표한다. /김현수 기자
정병길 감독이 영화 ‘악녀’ 세계관을 담은 NFT를 발표한다. /김현수 기자

‘그림’이 마르지 않는 아이디어의 원천이라는 정병길 감독은 ‘영화’와 ‘미술’을 결합한 대체 불가능 토큰(Non-fungible Token, 이하 NFT) 발표도 앞두고 있다. 전시 및 아트 관련 전문 기업 제이앤존의 글로벌 프로젝트 ‘아크피아(ARKPIA)’와 함께 한 이번 프로젝트는 한국 영화 감독으로는 정병길 감독이 최초다. 또 이 과정에서 직접 스케치한 그림들로 오프라인 전시도 계획하고 있다. 

“10년 전부터 개인전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개인전을 하면 작가의 지인들이 와서 칭찬해 주고 그림을 사주고 그러잖아요. 왜 굳이 돈을 들여서 갤러리에서 하지 싶었어요. 미술관 문턱이 낮았으면 좋겠는데, 미술관의 문턱은 너무 높잖아요. 그러다 NFT를 알게 됐죠. NFT는 또 다른 영화더라고요. 제가 그린 그림과 이야기가 공개되면 대중이 그것을 사게 되고, 또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부분이 신선했어요. 관객과 같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제는 내가 미술관 문턱을 낮추고 개인전을 할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정병길 감독의 NFT는 영화 ‘악녀’를 모티브로 한다. ‘또 다른 지구’라는 주제로 멀티버스에 7인의 빌런이 등장하며 각각의 세계관을 펼친다. 정 감독은 NFT 속 빌런 각각의 개성 있는 캐릭터, 배경, 역사 등을 적용한 방대한 세계관을 영화 시나리오처럼 구성했고, 이를 통해 다양한 스토리를 전개한다. 

“‘악녀’ 세계관에서 출발했어요. 지금은 시즌1이지만, 2‧3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영화 한 편이 나올 것 같아요.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어떤 캐릭터가 주인공이 될지 모르고 어떻게 이야기가 확장되는지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대중은 자기가 가진 NFT 캐릭터가 주인공이 되길 바라겠죠?”

정병길 영화감독의 세계관을 담은 대체 불가능 토큰(Non-fungible Token, NFT)이 발행된다. /제이앤존
정병길 영화감독의 세계관을 담은 대체 불가능 토큰(Non-fungible Token, NFT)이 발행된다. /제이앤존

정병길 감독은 NFT가 예술산업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영화는 부가적인 산업이 한정적인 것 같아요. VOD나 MD 상품 정도죠. 보거나 어떤 상품을 사서 간직하고 기쁘지만 그것으로 끝나잖아요. 그런데 NFT는 갖고 있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치가 올라갈 수 있는 것이죠. 복권 아닌 복권 같은 느낌도 있고, 주식 아닌 주식 같기기도 하고요. 나도 관객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고, 그게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지면 가격은 상승할 수밖에 없으니 도움이 될 수도 있고요. 

작가들에게도 굉장히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음원 같은 경우는 저작권료가 있는데, 그림을 하는 분들은 그런 게 거의 없어요. 만약 그림을 10만원에 팔았는데 다음날 100억이 돼도 작가에게는 혜택이 없죠. 원작자인데도요. 그래서 작가들이 예전에는 그림을 파는 것을 너무 싫어했어요. 100억이 됐을 때 팔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저작권이 없는 아트를 하다 보니 계속 하락세를 걷고 있는 느낌도 들었고요. 그런데 NFT는 원작자의 저작권을 보장해 주는 거니까 굉장히 좋은 게 아닐까 싶어요. 우리도 저작권이 생겼다!” 

재밌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정병길 감독이 만든 (왼쪽부터) ‘우린 액션배우다’ ‘내가 살인범이다’ ‘악녀’. /네이버영화
재밌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정병길 감독의 값진 결과물. (왼쪽부터) ‘우린 액션배우다’ ‘내가 살인범이다’ ‘악녀’. /네이버영화

“엄마 요즘 여자들은 그런 커피 안 마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그런 거 마셔.” (‘내가 살인범이다’ 대사 중)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고 NFT를 택한 것처럼, 정병길 감독은 본업인 영화에서도 관객에게 재미를 주고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가장 힘든 시기 ‘영화’를 만나 위로받고 힘을 얻었듯, 자신이 만든 작품도 누군가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주길 바란다고 했다. 

“힘든 시절 영화를 보면서 버텼어요. 그때 영화는 제게 재미라는 걸 줬어요. 즐거움이라는 걸 줬고, 행복이라는 걸 줬죠. 하루에 비디오 5~6편을 빌려봤어요. 장르를 다 다르게 해서요. 그 영화들을 들고 올 때 설레고 즐거웠어요. 제 영화도 관객들에게 재미와 행복을 줬으면 좋겠어요. 관객들이 기다려줬으면 좋겠고요.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고 NFT를 선택했고, 어렵고 심오한 프랑스 영화보다 주성치 영화, 할리우드 영화를 선택했듯, 제 영화를 보면 재밌고 희열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때로는 놀이동산에 온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재미’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을 항상 갖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앞으로도 도전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미 검증된 방식을 반복하며 안주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부딪히고 나아가며 계속해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각오다. 

“안정적인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을 선택하는 게 맞는지 고민을 하기도 해요. 하지만 결과를 모른다고 하면 새로움을 선택했을 때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큰 것 같아요. 또 누군가는 이런 도전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새로운 방식의 영화가 나오면 흥분했던 유년기를 보냈어요. 이제 제가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된 거죠. 후회를 하더라도 도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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