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자본주의 풍조의 침습을 막지 못하면 물먹은 담벼락처럼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매체들이 사회주의 체제의 고수를 주장하면서 연일 이렇게 외치고 있다. 요즘 세상에 담벼락에 물이 닿는다고 무너진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할 수 있지만 북한 체제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고려하면 무리도 아니다. 그만큼 북한 체제가 외부 문화에 취약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주민들이 드라마·가요를 비롯한 한류 문화에 맛들일까 노심초사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북한 당국에게는 비보로 들릴 일이 터졌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북한 식당에서 일하던 여종업원 3명이 집단 탈북해 9월 3일 한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이다. 8월 말 한국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을 요청한 뒤 비교적 신속하게 한국행 꿈을 이뤘다니 3명의 탈북민에게는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북한 식당 여종업원들이 집단으로 이탈해 한국에 온 건 2016년 4월 중국 저장성의 닝보우에서 일하던 여종업원 12명과 지배인 사건 이후 처음이다. 당시 국가정보원은 경기도 시흥에 있는 합동신문센터에 들어서는 일행의 모습을 공개했는데, 그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다. 

긴 머리에 염색을 하고 몸에 달라붙는 스키니진 형태의 차림을 한 이들은 영락없는 한국의 20~30대 젊은이들과 같은 스타일이었다. 개성이 드러나는 다양한 색깔의 여행용 캐리어와 원색 계열의 운동화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나이의 여성들이 얼마나 멋을 내고 자기가 좋아하는 헤어·패션 스타일을 따라 해보고 싶었을까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번에 입국한 북한 여종업원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해외근무를 하려면 무엇보다 출신 성분이 좋아야 한다. 노동당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야 하고 미모는 물론 전자악기 연주 등 예술적 기량이 있어야 해외 북한 식당에서 근무할 수 있다고 탈북민들은 귀띔한다. 철저한 심사과정도 거친다.

필자가 과거 중국 등 해외 북한 식당에서 만난 종업원들에게 평양에서의 생활이나 가정환경 등을 물어본 적이 있는데 상당수가 평양상업대학 출신이라 놀란 적이 있다. 평양상업대학은 젊은 층에 선호도가 높은 대학인데, 호텔이나 고급식당 등에서 일할 수 있는 서비스 소양을 갖춘 인력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이곳을 나와 북한의 회사에 배치돼 고려호텔이나 보통강호텔, 옥류관 등에서 근무하다 해외 근무 요원으로 선발된다고 한다. 대체로 3년 근무인데 명절 연휴 등에 잠깐 평양을 오갈 수 있는 중국 베이징이나 연변 등 가까운 곳을 선호한다. 항공편으로 장시간 이동하는 지역의 경우 근무기간 중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가는 게 쉽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개인의 호불호가 있기는 하지만 해외식당 근무의 경우 북한 생활의 답답함으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데다 현지에서 잘 먹고 한국 관광객 등이 팁으로 건네주는 달러 부수입을 챙길 수도 있다는 점에서다. 물론 최근 들어서는 대북제재로 관광객의 북한식당 이용이 제한되고, 코로나까지 겹쳐 손님이 급감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아무튼 철저한 선발 과정을 거쳐 믿고 해외에 내보낸 여종업원들이 집단 탈북에 나선다는 건 북한 입장에서 허를 찔릴 셈이 될 수 있다. 특히 청년세대들에 대한 사상교양을 강조하면서 체제결속을 촉구해온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스타일을 구기는 일이 됐다. 중국 닝보우 사태에 이어 또다시 해외 식당에서의 집단 탈북이 불거졌다는 점에서 북한이 달러벌이 차원의 식당운영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상황에 봉착한 듯하다.

6년 전 닝보우의 북한식당에서 일하다 서울에 온 12명의 여종업원들은 최근 들어 외부활동을 조심스레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을 졸업한 이들 중 일부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키우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정착 초기 신변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주민등록 이름을 아예 성까지 바꾼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성형수술을 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게 하기도 했다. 그만큼 신상 노출에 따른 걱정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일부는 연주가와 가수 등으로 공개 활동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탈북 일행 가운데 북한 최고의 가수 최삼숙의 딸로 알려져 화제가 된 리은경 씨는 기타리스트로 변신해 최근 공연무대에 모습을 보이고 있다. 리 씨는 9월 초 통일부가 한강 노들섬에서 개최한 행사에 참가해 밴드 일행과 능숙한 연주를 펼쳐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 한 유튜브 채널에서는 남한 출신 기타리스트와 함께 공연하면서 아리랑을 편곡해 선보이는 등 음악적 기량을 드러냈다.

이번에 입국한 타슈켄트 북한 식당의 여종업원들도 상당기간 은둔의 생활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착초기에는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 함께 온 일행들끼리 만나 소통하는 게 전부일 정도라고 한다. 이국땅에서 이런저런 마음고생 했을 여종업원들이 하루빨리 한국에서 행복한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선망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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