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유가족,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故) 황민웅 씨의 부인 정애정 씨 인터뷰
“이건희 회장 만나면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날 것 같다”

[시사위크=권정두 기자] 지난 6일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삼성 반도체공장 백혈병 피해자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 화제를 모으고 있다. 힘겹게 피해자들은 여전히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채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다. <시사위크>는 또 하나의 유가족, 고(故) 황민웅 씨의 부인 정애정 씨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고(故) 황민웅 씨의 부인 정애정 씨.
정애정 씨는 1995년 10월 꿈에 그리던 삼성에 입사했다. 반도체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마친 어린나이였지만 고향을 떠나 대기업인 삼성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는 생각에 마냥 떨리기만 했다.

고(故) 황민웅 씨는 1997년 7월 삼성에 입사해 정씨와 같은 부서에 배치됐다. 두 사람은 그렇게 삼성에서 만났고, 사랑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정씨가 25살, 황씨가 28살이던 지난 2001년 두 사람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처음 회사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정말 너무 설렜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아이들도 키웠다. 내 20대는 삼성 때문에 웃었던 것 같다. 남편을 만나게 해줬고, 또 우리 아이들을 갖게 해줬다는 점에서 삼성에게 고마웠다. 그래서 막연히 더 열심히 일했던 것 같다. 그때 삼성은 내게 희망이었다.”

◇ 불행과 긴 싸움의 시작

불행은 갑자기 들이닥쳤다. 결혼한 지 3년쯤 지나 정씨가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무렵 황씨는 몸의 이상을 감지했다. 처음엔 그저 감기몸살인줄 알았지만, 아무리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고 목에선 피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세 번째 결혼기념일을 하루 앞둔 날 고 황민웅 씨는 급성림프구성 백혈병이란 진단을 받았다.

“처음엔 무슨 병인지도 잘 몰랐다. 그저 백혈병이라 길래, 항암치료가 해야 한다 길래 심각하다는 걸 알았다. 병원에선 한시가 급하다며 입원 절차를 서둘렀다. 오진이 아닐까 의심했을 만큼 믿어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눈물이 났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병은 순식간에 황씨를 집어삼켰다. 병원에 입원한지 10개월 만에 황씨는 두 아이와 정씨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이 태어난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하지만 남편이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도, 남편이 사망했을 때도 정씨는 ‘산재’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느 날 남편의 직장 동료에게 전화가 왔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기사도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다산인권센터를 찾았고, 먼저 문제제기를 하신 황상기(고(故) 황유미 씨 아버지) 씨도 만나게 됐다. 그렇게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됐다.”

 
산재 문제를 제기하기까지 정씨는 한 달을 고민했다. 삼성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정씨는 그 누구보다 삼성을 잘 알았다. 삼성이 얼마나 거대하고 무서운 곳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건 가슴 속에 묻었던 아픈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싸우지 않으면 마음이 편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죽은 아이아빠도 진실이 밝혀져야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삼성과의 싸움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하나의 벽을 간신히 넘으면 또 다른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활동을 하면서 심한 모욕을 당한 적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엉뚱하게 가해자로 몰려 재판장에 서기도 했다.

정씨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길거리에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거나 무단횡단을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정씨를 ‘괴물’로 바라봤다.

“가장 힘든 건 지난날을 돌아볼 때다. 1~2년 안에 끝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위안을 삼을만한 작은 성과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사람들이 내게 무턱대고 욕이나 손가락질을 할 때면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흘려버려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되고 눈물이 날 때도 많다.”

 
◇ 이건희 회장 만나면 무슨 말 할 수 있을까…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들은 이제 아버지가 어디서 일하다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다. 정씨가 따로 알려준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아이들은 이제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에 불과하다.

“아이들이 조금 더 커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을 때쯤 말해주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빠와 백혈병, 삼성과 이건희에 대해 물어보더라. 인터넷을 하면서 아빠와 엄마의 이름을 쳐보고 알게 된 것이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정씨는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너무나도 많은 기대와 실망을 반복한 탓이다. 그런데 그 영화에 많은 사람들이 성금을 내고, 이름을 대면 알만한 배우들이 출연해 완성궤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또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말 ‘만들어질 수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박철민이 나온대’, ‘윤유선이 나온대’ 하는 소식이 들리더니 영화가 다 만들어졌다고 하더라. 정말 기적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영화 개봉을 앞두고 상영관 문제가 생겨 한편으론 아직도 걱정이 된다. 이왕 하는 거 ‘변호인’처럼 1,000만 관객을 넘었으면 한다.”

정씨가 삼성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인정’이다. 그리고 인정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원하고 있다.

 

“돈이 문제였다면 벌써 해결됐을 것이다. 삼성은 그동안 쌓아놓은 그들의 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정은 곧 소비자와 노동자들의 불신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해결의 시간을 단축하는 것, 그 열쇠는 삼성이 쥐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정씨 앞에 이건희 삼성 회장이 나타난다면 어떨까.

“예전에 우리 아들도 같은 말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글쎄 어떻게 할까’ 했더니 ‘엄마 멱살을 잡아요!’라고 하더라.(웃음)”

정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욕을 할까, 때릴까, 침을 뱉을까, 똥물을 한바가지 얼굴에 끼얹을까 별별 생각을 다 해봤지만 막상 보면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날 것 같다. 그리고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당신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반성을 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보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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