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욱 박사와 기자의 만남은 지난 23일 서울 종로 낙원시장에서 갑작스레 성사됐다. 이날 신 박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가 이를 접고 공화당을 창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 소미연 기자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박근혜 대통령의 제부 신동욱 박사가 잠행을 끝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취업준비생’으로 알려졌던 그가 고심 끝에 선택한 길은 ‘정치’였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창당 준비에 나선 신 박사는 캐주얼점퍼에 가방을 등에 맸다. 그리곤 직접 발로 뛰었다. 버스와 전철을 이용하며 민심을 살폈고, 지인들과 만나는 곳곳에서 ‘깜짝’ 회의를 열었다.

신 박사는 기자와 만난 지난 23일 저녁에도 지인들과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공화당의 미래를 계획했다. 이른바 ‘막걸리 토크’다. 서울 종로 낙원시장의 초원식당 앞, 탑골공원 담벼락 아래서 신 박사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제가 담벼락 생활을 6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저는 학교를 떠나 직업을 잃었고 돈도 없었어요. 그래서 서울 시내를 걸어 다녔는데, 마침 여길 찾은 거죠. 막걸리 한 병에 1500원, 안주가 3000원입니다. 여기서 시간을 보냈어요. 옥고를 치르고 나서도 다시 찾아왔죠. 여기, 이곳, 담벼락이 제가 스스로 선택한 유배지입니다. 출소하면서 다짐했던 게 ‘5년 동안은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살겠다’ 였거든요. 현 정부에 누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신 박사는 처형인 박 대통령에 대한 비방글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지난 2011년 8월 구속된 뒤 1년6개월 형을 마치고 2013년 2월21일 출소했다. 이후 신 박사는 “과거 행동에 대해 많이 반성하고 조용히 지낼 것을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어”

실제 신 박사는 출소 이후 자숙하며 책 ‘신이 된 대통령’ 집필에 몰두했다. 최근에는 서울 충정로 서서갈비에서 ‘박정희·육영수 영정 사진전’을 열었다. 그의 행적이 민정수석실에 보고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온” 만큼 자신있었다.

“박 대통령의 취임 1주년에 이런 기사가 나왔어요. 현 정부에서 친인척 비리가 1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요. 그래서 제가 아내한테 ‘여보, 우리가 해냈어!’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아내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서방님, 힘드시더라도 담벼락 생활을 계속 하셔야 해요.’ 당연하죠. 현정부가 끝날 때까지 담벼락 생활을 계속 이어갈 생각이에요. 다만 제가 정치를 하려는 것은 지금 정치 상황이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고 있고, 이것이 극에 달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용기를 낸 거죠.”

신 박사가 생각하는 정치는 ‘자기희생’이다. “내가 끊임없이 죽어야만 상대를 살리고 나도 사는 길”이라는 것. 때마침 ‘안철수’의 등장은 신 박사도 기대를 갖게 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민주당과의 합당 선언은 “모든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줬을 뿐 아니라 이로써 “안철수의 새정치도 없어졌다”는 게 신 박사의 설명이다.

▲ 신동욱 박사는 창당을 준비 중인 공화당에 대해 ‘중소정당’, ‘쌩얼정당’으로 불러달라면서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보여주지 못했던 ‘새정치’를 직접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 소미연 기자
“결국 안철수의 새정치는 버드(bird)정치가 됐습니다. 안철수는 처음부터 새정치와 어울리지가 않았어요. 안철수는 기득권 세력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로얄패밀리 가문 중에서도 로얄패밀리인데, 가진 게 없는 사람입니다. 자가용 없습니다. 버스타고 전철 타요. 당 대표라고 하면 꼭 넥타이를 매야 합니까? 아니잖아요.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유비쿼터스 시대죠. 여기에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모바일 오피스 시대가 됐어요. 걸어 다니는 사무실이 됐단 말이죠. 그래서 거창한 사무실은 필요 없어요. 저희 공화당 사무실은 컨테이너박스입니다. 컨테이너박스에서 부정부패가 일어나겠어요?”

신 박사는 새정치를 위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스피드(speed)’라고 말했다. 그는 징기스칸의 세계 재패가 속도전의 승리였다는 사실에 빗대 “우리나라가 IT 강국이라고 해서 최고의 속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정치는 가장 노후 됐다”고 지적했다. “정치 분야가 가장 빨리 달려야 하는데 아날로그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신 박사는 공화당의 주요 타깃층을 ‘203040’으로 잡았다. 20~40대 세대들에게 정치권에 가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목표다.

“우선은 6·4지방선거에서 최소 시의원 1석, 구의원 1석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잖아요. 무리수를 둘 필요도 없고요. 우리는 지방선거에 목숨을 건 게 아닙니다. 이번 선거에선 정당으로서 면모만 갖추면 되요. 다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우리 정당을 ‘중소정당’, ‘쌩얼정당’으로 불러 달라는 겁니다. 화장을 지웠을 때 예뻐야 진정한 미인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요즘 미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대게가 화장발인 경우가 많더라고요. 우리 유권자들이 역겨워하는 게 바로 그 점이 아닙니까? 정치인들이 가면을 벗어야 해요. 공화당은 가식 없이 민낯 그대로 보여 드릴겁니다.”

◇ “박근혜 제부 수식어, 오히려 고마워”

당장 선거에 출마할 계획은 없지만 신 박사도 ‘차기’를 검토하고 있다.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다. 아내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의 응원이 힘이 됐다. 신 박사의 정치 활동을 줄곧 반대해왔던 박 전 이사장이 지금은 손수 당원증을 받으러 다녔다.

“제가 뜻을 세워 세상 속에 나가겠다고 하니까, 아내가 이제는 정치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유를 물어보니 ‘내가 그동안 지켜본 나의 남편은 정치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고 본다. 그러니 이제는 당신의 꿈을 펼쳐보세요’라고 말해줬어요. 아내의 동의가 없었다면 제가 공화당 창당까지 갈 수 있었겠습니까? 아내의 승낙이 없으면 밥 얻어먹기 힘들어요. 아내의 가장 무서운 말이 ‘밥 안 한다’, ‘빨래 안 한다’에요. 저는 그 말이 떨어지면 바로 충성하거든요.”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신 박사의 휴대폰 진동소리는 계속 울렸다. 아내 박 전 이사장이었다. 신 박사는 휴대폰을 보이며 “우리 아내가 당원증 때문에 바빠요. 적극적이죠?”라며 웃었다. 하지만 박 전 이사장은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전면 등장은 하지 않는다. 신 박사의 홀로서기를 위해서다. 이에 대해 신 박사는 “아내가 참여하진 않겠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가장으로서 당당하게 홀로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박근혜 제부’가 아닌 ‘공화당 대표’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옥고를 치르고 나오니 세상이 달라졌어요. 옥고를 치르기 전에는 전직 대통령의 사위였는데, 옥고를 치르고 나온 순간 현직 대통령의 제부가 됐어요. 제 운명도 기구한거죠. 하지만 ‘박근혜 제부’라는 수식어가 싫지 않아요. 오히려 고맙죠. 저도 박 대통령만큼 훌륭한 정치인이 되고 싶어요. 제 개인적인 능력을 보이고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면 수식어가 사라지겠죠. 그 수식어를 떼어내는 게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공화당 대표 신동욱’으로 불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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