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은 중동 4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리퍼트 대사의 병문안을 첫 일정으로 삼았다.

[시사위크=정계성 기자] 마크 리퍼트 주한미대사의 피습사건으로 한국의 외교적 선택폭이 줄어들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실상 이번 사건으로 대미외교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것.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사드배치 문제 등 그간 한미관계에 잡음이 있었다”며 대미외교 강화를 시사한 가운데, 벌써부터 정치권에서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논의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드의 한반도 배치는 남북과 미국, 중국이 모두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문제다. 사드의 관측범위는 북한을 넘어 중국까지 미친다. 시진핑 주석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사드의 배치를 반대하는 이유다. 우리 입장에서는 사드배치를 막는 대신, 미국이 납득할 정도로  북한의 비핵화에 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좋다. 그러나 강대국들 사이 ‘힘의 논리’ 속에서 한국의 목소리가 힘을 얻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 사드배치, 중국과 미국사이에 낀 한국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은 사드문제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보이는 등 미국과 다소 소원한 관계를 이어왔다. 더구나 역사문제로 일본과 최악의 관계를 맺으면서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에 대해 의심스런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웬디 셔먼 국무부 2차관의 발언도 이와 무관치 않다. 다만 셔먼 2차관의 발언이 한국 내 여론을 자극하면서 미국정부가 공개적으로 한발 물러섰고, 일각에서는 모처럼 우리가 한미관계에 주도권을 잡는 게 아니냐는 긍정적인 분석도 나왔다.

그런데 리퍼트 대사 피습사건으로 180도 상황이 달라졌다. 한 나라의 대사가 피습되는 상황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다행히 리퍼트 대사의 자연스러운 대처와 미국정부의 노력으로 미국여론은 대체적으로 잠잠하다는 소식통의 전언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와 리퍼트 대사에게 외교적 부채를 안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 같은 외교적 부채는 향후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 한다. 박 대통령이 리퍼트 대사를 병문안한 자리에서 “이번 사건으로 한미관계가 더욱 가까워질 것”이라는 말이 무겁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구상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북한, 중국, 러시아를 아우르는 경제안보협력의 큰 그림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합병으로 미국과 유럽과의 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오는 러시아 전승기념일 참석 여부를 두고 박 대통령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사진=신화/뉴시스>

외통위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만약 우리나라의 대사가 타국에서 피습을 당했다고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피해국가인 우리가 사태를 잘 수습해줬는데, 국민이 납득할만한 것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고 있지만, 대미외교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 같은 관점에서 중국 왕이 외교부장의 ‘북중정상회담 가능성’ 발언이 눈길을 끈다. 왕이 부장은 지난 8일 베이징 미디어센터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정세는 총체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으며 중국은 이를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도 “한반도 정세는 또다시 민감한 시기에 접어들었다. 우리는 관련국이 냉정과 절제를 통해 양호한 분위기와 적극적인 조건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에 차질?

한편 대미외교를 강화하는 외교기조 속에서 박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에도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란 포항에서 시작해 북한, 중국을 거쳐 러시아까지 이어지는 경제협력의 큰 그림이다. 작게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서 시작해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경제협력으로 안보까지 아우른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그 첫 행보로서 오는 5월 9일 러시아 전승기념일 참석이 주목을 받았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 속한 중국과 북한은 이미 참석을 통보했고, 박 대통령이 참석한다면 논의가 급물살을 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자리에서는 박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만남도 성사될 가능성도 높다.

다만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합병으로 감정이 좋지 않은 미국과 유럽국가들이 참석에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적신호가 켜졌다. 앞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 전승기념회 불참을 선언하면서 “전 세계가 주권 존중과 영토 단일성이라는 원리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며 타 동맹국들의 참석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현재까지 한국정부는 참석여부에 대해 공식입장을 유보한 상태다. 다만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박 대통령이 불참하지 않겠냐는 관측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경제정의실천연대는 논평에서 “동북아 정세는 남북관계, 북미관계 악화와 일본 우경화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한미관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기”라면서도 “이번 피습사건으로 인해 우리 정부의 외교적 역할과 선택폭이 좁혀지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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