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는 고졸신인이라는 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김선규 기자] 그의 이름은 실력보다 먼저 알려졌다. 전설적인 아버지를 둔 ‘덕분’이자 ‘탓’이었다. 때문에 그는 많은 기대와 부담을 동시에 떠안아야 했다. 하지만 결국 이름이 아닌 실력을 앞세워 자신에게 향한 기대와 부담을 감탄과 환호로 바꿔버렸다. 넥센 히어로즈의 신인 이정후의 이야기다.

이정후가 넥센으로부터 1차 지명을 받은 지난해 6월에도, 스프링캠프가 시작된 올해 1월에도 이정후의 올 시즌 활약을 예측한 이는 사실상 없었다. 아직은 적응과 경험의 시간이 필요한 신인일 뿐이었다. 시즌 개막 직전 시범경기에서 타율 0.455로 맹활약을 펼치기도 했지만, 그를 향한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젊은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는 넥센은 이정후를 개막전 명단에 포함시켰다. 이정후는 개막전에서 8회말 대타로 프로 첫 타석에 섰다. 많은 관중과 야구인들의 시선이 ‘이종범 아들’ 이정후에게 향했다. 초구부터 매섭게 방망이가 돌아갔고, 타구는 외야로 향했다. 아쉽게도 플라이볼.

이튿날 두 번째 경기에서도 대타로 한 타석에 들어선 그는 2루 땅볼로 물러났다. 세 번째 경기에서는 선발 출전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땅볼 2개와 삼진 하나. 이정후는 개막 3연전에서 5타수 무안타 1삼진의 기록을 남기며 시범경기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자칫 프로의 벽을 실감하고 자신감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 심지어 넥센은 라이벌 LG 트윈스를 상대로 개막 3연전을 모두 패했고, 신인에게 기회를 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 경기에서도 이정후는 선발로 출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알을 깼다. 타석에 4번 들어선 그는 3연속 안타를 기록했고, 마지막엔 4구를 골라냈다. 4번의 타석 모두 1루를 밟은 것이다. 또한 이날 이정후는 자신의 프로데뷔 첫 득점도 기록했다.

이후 이정후는 자신의 입지를 신인에서 주전으로 서서히 이동시켰다. 여기엔 그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넥센의 기회 부여도 크게 작용했다.

선수 육성에 강점을 보이는 넥센은 최근 여러 차례 신인왕을 배출한 바 있다. 사진은 지난해 신인왕 신재영(왼쪽)과 올해 가장 유력한 신인왕 후보인 이정후. <뉴시스>

물론 이정후처럼 신인선수들이 재능과 패기를 앞세워 깜짝 활약을 펼치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프로의 세계가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장단점이 파악되거나, 슬럼프 또는 체력부담을 겪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아직 ‘프로의 몸’과 거리가 먼 고졸신인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정후는 보통의 신인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 놀라울 정도의 안정감을 보였다. 신인들에게서 느껴지는 지나친 긴장감은 없었고, 그렇다고 유명세를 등에 업은 거만함도 없었다. 적당한 긴장감 속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야구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기 전이나 후에는 아직 어색하고 앳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순간만큼은 ‘신인’이 아닌 ‘프로’였다.

이는 신인들이 가장 필요로 하지만, 가장 갖추기 힘든 태도다. 제 아무리 좋은 재능을 지녔다 해도, 심리적인 측면에서 무너지는 신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정후는 일찌감치 프로의 태도를 체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정후를 향했던 물음표는 이제 느낌표로 바뀌었다. 이정후는 21일 기준, 넥센이 치른 115경기에 모두 출전해 430타수 146안타 타율 0.340을 기록 중이다. 넥센의 에이스 서건창과 같은 타율이자, 전체 9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146개의 안타 숫자는 리그 4위다. 또한 0.412의 출루율은 리그 10위에 해당하고, 득점은 89점으로 3위를 달리고 있다. 리그 최정상급 테이블세터 지표라 할 수 있다.

이정후는 사실상 올해 신인상을 확정지은 상태다. 평생 한 번뿐인 신인상이라지만, 그에겐 조금 싱거워 보일 정도다. 오히려 이정후는 프로야구의 새 역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이미 23년 만에 고졸신인 최다안타 기록을 경신했다. 신인 최다안타 기록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기록은 전 경기 출장이다. 신인, 그것도 고졸신인이 한 시즌을 100% 소화하며 줄곧 맹활약을 펼치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다. 구단 수가 늘어나면서 경기 수도 144경기로 증가한 최근엔 더욱 그렇다.

실제로 고졸신인의 전 경기 출장 기록은 우리나라 프로야구 역사에 아직 없다. 이정후가 이를 달성한다면, 최초의 발자국을 또 하나 남기게 되는 것이다.

이정후에게도 여러 고비가 있었다. 특히 최근 치러진 경기에선 부상 위기를 마주하기도 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고, 대타를 통해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베테랑 선수들도 체력에 부담을 느끼는 시기가 온 만큼, 앞으로의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 체력적인 부담이 부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숫자는 ‘29’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