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정부의 문화 검열 및 블랙리스트 작성에 항의하는 예술인들이 설치한 박근혜 대통령,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풍자하는 조형물을 시민들이 살펴보고 있다.<뉴시스>

[시사위크=은진 기자] 박근혜 정부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큰 타격을 받았던 연극계는 문재인 정부 출범을 계기로 재기를 준비하고 있다. 오히려 연극계에서는 지난해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정치풍자극이 되살아나고 있어 “소재가 무궁무진해졌다”고 반기는 모습이다. 연극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도 높아져 ‘소셜펀딩’을 활용한 새로운 방식의 후원금 모금도 활발해졌다.

지난해 블랙리스트 파문이 터졌을 당시 연극인들이 뭉쳐 선보였던 ‘권리장전2016-검열각하’의 ‘시즌2’격인 ‘권리장전2017-국가본색’이 지난달 9일부터 5개월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국가본색’은 부당한 시대와 정치권력 등을 풍자하는 정치극으로 채워지는 연극 축제다. 5개월간 21개의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권리장전 측은 “‘국가본색’은 국내 유일의 정치극 축제를 주장한다”며 “연극인의 권력에 대한 투쟁의 시작은 무대이며, 무기는 연극을 하는 행위다. ‘국가본색’이 주창하는 정치는 권력적 구조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화된 소통의 정치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최대 지원배제’ 단체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연희단거리패, 극단유랑선, 극단 하땅세 등의 단체는 오는 15일부터 한 달 간 진행되는 국내 최대 공연 축제인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스파프)에서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 블랙리스트가 오히려 창작 밑거름

윤시중 극단 하땅세 대표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나서 연극 ‘위대한 놀이’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윤 대표는 “이 작품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상한 사람이냐 정상이냐가 갈리게 된다”며 “블랙리스트도 관점에 따른 분류가 아니었느냐는 생각이 드는데 정부가 바뀌었다지만 새로운 블랙리스트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직 유효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블랙리스트의 ‘악몽’이 창작에 일견 자극을 준 셈이다.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블랙리스트 파문 이후 “연극이 미학적 근거, 틀 속에서만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며 “연극이 이제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작정하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연극 ‘노숙의 시’ 기자간담회에서 밝혔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가 역설적으로 ‘혜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극단 관계자는 “풍자도 비판도 오래 보면 지친다”며 “박근혜 정부는 끝났지만 새로운 ‘리스트’는 언제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블랙리스트가 밝혀진 지 이제 겨우 1년 남짓이다.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전했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1일 전원 위원회 최종 의결을 거쳐 직권 조사를 개시한다. 첫 직권조사 대상은 부산국제영화제 외압과 서울연극제 대관 배제 및 아르코 대극장 폐쇄 사안이다. 이에 따라 연극·영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폭넓은 피해 사례 조사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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