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에 따르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2008년 삼성 특검에서 확인된 차명계좌에 대해 실명 전환은커녕, 누락된 세금도 납부하지 않고 4조4,000억원에 달하는 돈은 대부분 찾아간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은 2008년 4월 22일 이건희 회장이 그룹 경영쇄신안을 발표하며 그룹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고 발표하고 있는 모습.

[시사위크=정소현 기자] “차명재산을 실명 전환한 뒤 벌금과 누락된 세금을 납부하고 나머지를 유익한 일에 쓰겠다.”(2008년 4월 삼성특검에 따른 대국민사과 당시)

“(이건희 회장이) 약속을 지키시려고 방법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던 중에 갑작스러운 와병으로 타이밍을 놓친 것으로 알고 있다. 사회환원을 약속한 돈은 정말 좋은 일에 다 쓰겠다.”(2016년 12월6일 최순실 청문회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발언)

그렇게 차일피일 시간끌기를 해온 것이 벌써 10여년이 되어간다. 국민들은 삼성의 약속을 믿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차명계좌의 돈은 모두 출금됐고, 이에 대한 과징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국민들을 위해 쓰겠다던 돈은 이건희 회장의 ‘사생활’을 위해 쓰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실망을 넘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삼성이 보여주는 민낯은 ‘일류기업’과 거리가 멀어보인다.

◇ 거짓말에 거짓말… 삼성에게 ‘약속’이란?

지난 2008년 4월 17일 당시 조준웅 삼성 특검은 486명의 명의로 1,199개의 차명계좌에 약 4조5,373억원 상당의 이건희 회장의 차명재산이 예치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삼성생명 주식 2조3,119억원어치 등 주식 4조1,009억원과 예금 2,930억원, 채권 978억원, 수표 456억원 등이다.

며칠 뒤인 2008년 4월 22일, 삼성은 대국민사과와 함께 이건희 삼성 회장의 퇴진 및 전략기획실 해체를 선언했다. 그러면서 ‘차명계좌는 이건희 회장 실명으로 전환하고, 누락된 세금 등을 모두 납부한 후, 남는 돈을 회장이나 가족을 위해 쓰지는 않겠다’고 발표했다. 남은 돈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도 했다. 이 덕분에 재판에서 이건희 회장은 실형을 면할 수 있었고 곧이어 사면도 받았다.

그러나 2017년 10월 현재, 이 같은 약속은 ‘모두’ 지켜지지 않았다. ‘퇴진’을 선언했던 이건희 회장은 이후 은근슬쩍 경영에 복귀했고, 전략기획실도 ‘미래전략실’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2008년 조준웅 특검시 차명계좌 실명전환 실태자료-은행계좌/단위(건). 이건희 회장이 차명으로 보유하고 있던 64건의 은행계좌의 실명 전환율은 1.9%에 불과하다. 64개 가운데 단 1개만이 실명으로 전환됐고, 나머지 63개 계좌는 실명전환도 하지 않고 모두 계약해지 혹은 만기해지 된 것이다. <박용진 의원실>
2008년 조준웅 특검시 차명계좌 실명전환 실태자료-증권계좌/단위(건). 전약 출금(이체)된 계좌로, 2017년 8월 31일 현재 계좌 중 257개 계좌는 잔고가 없고, 54개계좌는 고객예탁금 이용료 등이 입금되어 유지되고 있다. <박용진 의원실>

차명계좌를 실명으로 전환하겠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차명계좌를 없애고 돈을 출금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에 따르면 64개 은행계좌는 단 1개만 실명전환이 됐고, 나머지는 돈을 찾고 해지해 버렸다. 증권계좌 957개도 모두 전액 출금했다. 이렇게 찾은 돈이 4조4,000억원에 달한다.

재산을 차명 관리한 데 대한 과징금 역시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박용진 의원은 금융위원회가 금융실명제 위반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금융위는 “당시 금융실명제에 대한 대법원 판례에 따라 유권 해석을 한 것일 뿐, 삼성에 특혜를 준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박 의원은 “금융위가 근거로 든 판결은 1997년 4월17일 선고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96도3377)으로, 그 중 법적구속력이 없는 일부 보충의견을 바탕으로 유권해석을 내놓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회환원에 대한 계획도 10여년째 오리무중이다. 삼성은 그동안 “준비중이다” “계획중이다”라는 앵무새 답변으로 시간을 끌어왔다. 오히려 삼성 측은 “사회환원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 없다”고까지 했다. 앞서 삼성 관계자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2008년 4월 당시 이학수 실장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사회에 유익한 일에 쓸 방도를 찾아 보겠다’고 했을 뿐 사회환원을 하겠다’고 직접 말한 사실은 없다”고 반박했다. “언론이 ‘사회환원 하겠다’고 받아들여 ‘이제는 시간이 지났으니 약속대로 내놓으라’며 압박하고 있다”고도 불평했다.

◇ ‘사회환원’ ‘사재출연’… 진심이었을까

사회공헌에 쓰기로 약속한 이건희 회장의 차명재산은 엉뚱한 곳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에 따르면 삼성 관계자는 지난해 논란이 된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심 동영상’이 찍힌 장소 가운데 한곳인 서울 논현동 빌라의 전세자금 13억원이 이 회장의 차명계좌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에는 이 회장의 서울 한남동 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정황이 포착됐다.

이재용 부회장은 그동안 불법·편법 경영승계 논란의 중심에 서 왔다. 진정성과 신뢰 회복만이 이재용 시대 개막을 위한 선결조건이라는 지적이 많았으나 여전히 거짓말과 꼼수를 이어오다 결국 벼랑끝에 서는 위기를 맞았다. 이재용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공여한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삼성 측은 규정에 따랐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의혹에 대해 공식적인 대응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박용진 의원은 금융위가 유권해석을 제대로 내렸다면 이건희 회장이 약 2조원의 세금과 과징금을 내야 했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박용진 의원은 “결국 삼성은 대국민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고 금융위원회는 이건희 회장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라면서 “지금이라도 징수하지 못한 과징금과 이자 및 배당소득세를 추징해 경제정의와 공평과세를 실현해야 한다. 수십 년간 차명계좌를 유지해 이자 및 배당소득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경우에 따라 과징금과 소득세를 수조원까지 추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신뢰의 기본은 ‘약속을 지키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는 어릴 때부터 배우는 덕목이다. 삼성은 그동안 편법과 꼼수로 국민들을 기만해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 해소 방식을 두고 전문가들이 엇갈린 의견을 내놓고 있긴 하지만, 삼성이 국민을 상대로 한 약속을 모두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없어 보인다.

어쩌면 삼성은 머지 않아 ‘사회환원’ ‘사재출연’ ‘대국민사과’ ‘경영쇄신안’ 등의 카드를 또 꺼내들지 모른다. 현재 구치소에 수감 중인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복귀 시점일 가능성이 크다. 삼성은 늘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총수 대행’ 역할을 해온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13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전격 선언하면서 삼성 내 대대적 쇄신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재용 체제’가 본격화될 것이란 시각이 많다. 하지만 이미 신뢰가 추락해버린 상황에, ‘이재용의 삼성’을 향한 기대감은 그리 커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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