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의 구질 배합이 승패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야구는 스포츠통계가 가장 먼저, 가장 깊게 발전한 스포츠다. <뉴시스/AP>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1977년은 스포츠통계의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한 해라고 불릴 만하다. 통조림 회사에서 야간경비를 서던 아마추어 야구사학자 빌 제임스는 이 해에 자비를 들여 자신의 연구결과물을 출판한다. ‘야구 개요: 다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18개의 통계정보 수록’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책자는 단 75부가 판매되는데 그쳤지만, 지금은 ‘세이버 메트릭스’라고 불리는 통계·수학적 스포츠분석방식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초석을 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빌 제임스는 이후 꾸준히 연구와 출판활동을 진행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는데 성공한다. 그가 개발한 수많은 지표들은 개량을 거쳐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수비범위를 나타내는 ‘레인지 팩터’와 득·실점을 바탕으로 승수를 예측하는 ‘피타고리안 승률’ 등이 그것이다. 선수가 팀의 승리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판단하는 ‘윈 쉐어’는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로서 타 스포츠에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 두각 드러낸 세이버 메트릭스의 총아들

빌 제임스의 열정은 스포츠통계를 신봉하는 무수한 추종자들을 낳았으며, 이들의 믿음은 상당 부분 성과로 입증됐다. 오클랜드 어슬래틱스는 영화 ‘머니 볼’로 유명한 빌리 빈 단장의 지휘 하에 메이저리그 20연승을 내달렸다. 빌리 빈 단장은 당시까지만 해도 천대받던 지표인 출루율에 주목해 몸값이 낮은 선수들로 높은 승률을 거뒀다. 빌 제임스 본인은 2003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영자문으로 취임했으며, 보스턴은 그 다음 해에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스포츠통계가 야구에서 발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투수와 타자의 가위바위보 싸움이라고도 불리는 야구는 선수위치가 고정돼있고 구질의 배합이 승패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등 통계분석이 파고들기 좋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이버 메트릭스의 성공을 목격한 각계의 구단운영자들은 한 종목에 만족하지 않았다. 특히 소프트웨어의 발달과 함께 도래한 빅데이터 시대는 스포츠에서도 그 활동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IBM이 개발한 테니스데이터사이트 슬램트래커(Slamtraker)가 대표적이다. “선수 개개인이 우승확률을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는 설명처럼 슬램트래커는 대회당 4,100만여건에 달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우승확률을 높일 수 있는 3개의 ‘열쇠’플레이를 선택해 보여준다. 2014년 프랑스 오픈에서 슬램트래커가 제시했던 40% 이상의 서비스 리턴득점‧52% 이상의 중간 수준 랠리‧62% 이상의 서비스 득점을 모두 달성하며 우승컵을 들었던 마리아 샤라포바가 그 예시다.

생체인식기술의 발전은 축구와 농구가 선수들의 움직임 파악이라는 큰 산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제 대부분의 축구통계 사이트는 선수가 90분 동안 그라운드의 어느 영역을 누볐고 그 빈도는 어떤지를 보여주는 히트맵을 제공하고 있다. 소프트웨어회사 ‘세컨드 스펙트럼’의 라지브 매헤스워렌 최고경영자는 NBA 선수들의 움직임을 점으로 표현해 기계에 인식시키는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알고리즘을 통해 어떤 공격전술이 가장 효율적인 슛 기회를 제공하는지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야구에는 열광, 야구 기록에는 무관심?

한국은 아직까지 스포츠데이터산업의 규모가 크지 않다. 사진은 1992년 열렸던 프로야구 경기의 기록지. <뉴시스>

스포츠 열기와 통계학의 발전수준에서 모두 세계 최고라 할 만한 미국은 데이터분석의 중요성을 빠르게 인지했다. 프로구단과 매체들은 적극적으로 통계전문가들을 영입해 자신들의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다.

반면 한국은 스포츠 인기는 높은 반면 스포츠통계시장은 아직까지 협소하다. KBO와 KBL의 전력분석담당 코치들은 대부분 은퇴한 선수 출신이다. 스포츠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현장 경험을 높이 산 것이지만, 스포츠통계의 전문화가 진행되고 있는 국제흐름에 비춰볼 때 아쉬움이 많다. 스포츠통계 전문가를 꿈꾸는 청소년이 진로에 대해 조언을 구하려 해도 ‘미국에 가라’는 답변밖에 듣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정보 보유·공유 수준도 낮다. 시청자가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질수록 생산적 논의와 분석이 이뤄질 저변이 확대되기 마련이다. 국내 스포츠연맹들이 제공하는 선수 및 경기기록의 질과 양은 아직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NBA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는 선수 효율성 지표인 PER이 KBL에 도입된 것도 불과 두 시즌밖에 되지 않았다. 정보접근성이 떨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스포츠통계에 대한 팬들의 관심도 높지 않다.

다만 최근에는 프로야구를 중심으로 데이터분석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향후 전망에 대한 기대감은 형성되는 분위기다. 2000년대 후반 ‘데이터 야구’로 프로야구의 정상에 섰던 SK 와이번스의 뒤에는 국내 야구 데이터분석의 최고 전문가로 뽑히는 김정준 전 코치가 있었다. 작년 한국인 데이터분석가가 최초로 NBA 구단의 경영팀에 합류했다는 뉴스는 유학파들의 활약도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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