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 부부장이 청와대 경내를 나란히 걷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정계성 기자] 평창올림픽 개막식을 계기로 북미회동을 추진했으나 불발됐다는 게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만남 예정시각을 2시간 전 북측이 일방적으로 취소했다는 게 미국 측의 주장이다. 펜스 부통령은 김여정 제1 부부장에 대해 “악의 가족 일원이자 독재정권의 핵심”이라고 비난한 것으로 미국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당초 북미회동에 대해 “확인해줄 수 없다”던 청와대도 간접적이지만 시인했다. 취재진과 만난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지난번 (북미회동을) 시도했고 또 주도하는 과정에서 두 나라가 처한 현재 상황을 인식하고 갔기 때문에 당장 (만남이) 이뤄질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방카 보좌관과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회동은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얼떨결에 인정한 셈이다.

북측이 어떤 이유로 취소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국 대표단의 행보를 살펴본 김여정 등 북측 인사들이 만남의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분석한다. 펜스 부통령은 방한 전 일본을 방문해 아베 일본총리와 대북제재에 목소리를 냈고, 국내에서는 천안함 기념관을 방문했었다. 북측 입장에서는 오히려 만남이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는 얘기다.

◇ 펜스 부통령의 아리송한 행보 

특히 지난 9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개막식 사전 리셉션에서의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펜스 부통령과 아베 총리는 예정시각에 지각, 문재인 대통령의 공식 영접행사가 끝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행사장에 도착해서도 리셉션장으로 바로 입장하지 않고 밖에서 따로 기념촬영을 했다.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문 대통령이 오고 나서야 두 사람은 리셉션장에 입장했다. 그러나 펜스 부통령은 착석하지 않은 채 타국 정상들과 인사만 나누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김영남 위원장과는 악수조차 나누지 않는 등 냉기류가 연출됐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펜스 부통령은 미국 선수단과 오후 6시 30분께 저녁 약속이 되어 있었고 우리 측에 사전고지를 한 상태여서 테이블 좌석도 준비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헤드테이블에는 펜스 부통령 내외를 의미하는 명패와 빈 좌석이 현장에 있던 것으로 확인돼 해명이 군색해졌다. 청와대는 행사시작 1시간 전에야 펜스 부통령 측이 불참의사를 전달했던 것으로 뒤늦게 털어놨다. 

이와 관련 일본 산케이 신문이 전한 바에 따르면, 펜스 부통령이 아베 총리에게 먼저 연락해 리셉션 참석 동행을 요청했다. 그리고 김영남 위원장과의 사진촬영을 원치 않았던 두 사람이 일부러 리셉션에 지각을 했다는 게 핵심이다. 북한 입장에서 이는 회동을 해봐야 미국 측의 강경한 입장만 국제적으로 부각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리셉션 현장에 있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한 라디오 방송에서 “내가 아는 척을 하니까, (김영남 위원장이) 고개를 드는데 얼굴이 벌개져 있더라.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던 것 같다”고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전 리셉션 영접행사에서 각국 정상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자리에 펜스 부통령과 아베 총리는 빠졌다. <뉴시스>

◇ 펜스 부통령 행동에 얼굴 붉힌 김영남 위원장

우리 입장에서 중요하게 봐야할 부분은 취소 결정 주체가 누구였느냐다. 중요한 일정이었던 만큼, 김정은 위원장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 체제상 위임에 의한 결정은 상상키 어렵다는 점에서다. 접촉 예정시각 직전에서야 취소통보를 한 것도 김 위원장의 결단을 받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김여정 제1 부부장이 상당부분 재량권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북측 고위급 대표단의 일정은 방한이 이뤄진 뒤 구체적인 조율이 필요했다. 다소 급하게 결정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의 협상을 위해 대표단에게 어느 정도 범위의 재량권이 주어졌을 것이란 분석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북측이 단장으로 김영남 위원장을 정해놓고, 고심 끝에 뒤늦게 공개한 대표단 3명 중 김 제1 부부장을 포함시킨 것도 설득력을 더하는 대목이다.

소소한 내용이지만 협의가 원만하게 이뤄진 것도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삼지연 관현악단의 공연 가운데 북한 체재 찬양곡이나 논란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우리 측 요청을 받아 가사를 수정해 공연했다. 합동공연을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도 받아들여 연습기간이 없었음에도 소녀시대 서현과 함께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다. 과거 대북협력을 담당했던 한 관계자는 “사소한 내용 하나 바꾸는데도 결정이 오래 걸렸고, 반응도 예민했는데 상당히 달라진 장면”이라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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