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지난 며칠 동안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네. 이번에는 일부러 과거에 인연이 있었던 곳만 골라 다녔어. 그래서 40여 년 전 2년 6개월 동안 군복무를 했던 인제 가리산 아랫마을도 갔네. 옛날 군대 생활 할 때를 되돌아보면서 삼각대 설치하고 셀프 포트레이트를 찍고 있는데 동네 어르신 한 분이 다가와서 말을 걸더군. 뭐하냐고 물어서 예전 군복무 시절에 여기에서 쌓았던 추억들을 되살리고 있다고 말씀 드렸더니 씽긋 웃더군. 자기도 20대 후반에 이곳에 들어와 산지 50여년이 다 되어간다고 하면서 괜찮으면 자기 집에 들어와서 차 한 잔 하고 가라는 거야. 요즘 세상에 아직도 이렇게 인심 좋은 분이 있는 게 신기해서 아무 말 없이 따라 들어갔지. 그 어르신께서 손수 타 주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1970년대 후반 그 마을에서 겪었던 많은 경험들과 인연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산중 인심에 대한 감격의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네. 왜냐고? 갑자기 어르신께서 “지금 서울 무척 시끄럽죠?”라고 묻는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무슨 뜻인지 몰라 망설이고 있으니 답답한 듯 스마트폰을 켜서 보여주더군. 난 그런 중계방송도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네. ‘북한 간첩인 문재인은 물러나라!’는 구호가 생생하게 들리는 태극기부대 시위 현장이었네. 어르신께서도 몇 말씀 거들더군. 문재인이 곧 물러나게 생겼다고. 전라도 광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데모를 하고 있다고. 이런 것도 모르고 카메라나 들고 다니는 내가 답답했는지 한 말씀 덧붙이더군. 정부의 언론 통제와 여론 조작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하지만 머지않아 문재인은 간첩으로 탄핵될 거라고.

더 이상 방에 앉아 있는 게 불편해서 ‘어르신, 사진 한 장 찍어드릴까요?’하고 물었더니 싫다하더군. 그래서 커피 맛있게 마셨다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오는데 가슴이 답답하더구먼. 공기 좋고 물 좋은 가리산 산골에서만 50여년을 살고 있는 순박하고 인정 많은 시골 노인이 왜 문재인 대통령을 저렇게 미워하고 저주할까?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떠올리며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분의 행동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네.

그때 생각난 게 『열자』「설부」편에 나오는 한 노인 이야기였네. 요약하면, 옛날 중국에 도끼를 잃어버린 한 노인이 있었네. 노인은 이웃집에 사는 아이가 훔쳐갔을 거라고 믿었지. 일단 그렇게 의심하니 그 아이의 걸음걸이, 표정, 말투, 태도 등등 모든 게 다 도끼를 훔쳐가지 않은 것 같은 데라곤 한 군데도 없어 보였어. 하지만 머지않아 노인은 산 속에서 잃어버렸던 도끼를 찾았네. 다음날 길에서 그 아이를 만난 노인은 다시 그 아이를 유심히 바라보지. 그러나 이제 그 아이의 행동 어디에서도 도끼를 훔칠 사람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발견할 수 없었네.

세상만사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다 의심스럽게 보이네. 반면에 내 편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게 다 믿음직스럽게 보이고.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무서운 건 이 때문이야. 언젠가 확증편향(confirmative bias)이라는 심리적 장애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지?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해주는 정보만 찾고, 자신이 좋아하는 이론이나 설명을 강화시켜주는 사실만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네. 그러면서 자신의 믿음에 어긋나는 통계수치나 정보는 잘못된 것으로 무시해버리거나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지. 내가 가리산에서 만난 노인이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도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들을 정부의 언론 통제나 여론조작이라고 믿는 것처럼.

여행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전 처음 보는 길손을 위해 손수 커피를 타주던 78살 어르신의 손과 얼굴 모습이 눈에 선하네. 몇 개월 후면 문재인 대통령이 탄핵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분인데, 그 ‘몇 개월’후에도 대통령이 지금 그 자리에 건재할 때 그분이 겪게 될 정신적 혼란과 고통을 생각하면 내 마음도 아프네. 거짓 정보와 가짜 뉴스로 그런 노인들의 삶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이른바 ‘애국우익세력’들의 선동이 고약하기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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