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요즘 평양에서 제일 잘 나가는 두 사람을 꼽으라면 이설주와 김여정이다. 각각 김정은의 부인과 여동생이다. 29살 동갑이자 올케와 시누이 사이인 이들은 남편과 오빠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후광을 업고 활발한 공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설주는 한동안 내조와 부부동반 공식 활동에 제한적으로 나서는 것으로 파악돼왔다. 하지만 올 들어 심상치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설주는 지난 2월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군 창건 70주년 기념 퍼레이드에 김정은과 함께 참석했다. 그런데 북한 관영매체들은 이설주를 ‘여사’로 호칭했다. 조선중앙TV는 열병식 행사를 녹화 방영하면서 “김정은 동지와 이설주 여사가 열병식장에 나오셨다”고 전했다.

북한은 김정은 집권 첫 해인 2012년 7월 이설주를 처음 등장시키면서 ‘부인 이설주 동지’로 불렀고, 이후 이 호칭을 줄곧 사용해왔다. 그런데 이를 바꿔 처음으로 ‘여사’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에서 ‘여사’라는 호칭은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1949년 사망)에게만 부여돼왔다.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도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방북 당시 관영매체에 ‘부인’으로만 소개됐다.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2004년 사망)의 경우 사실상 북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지만 공개석상에 나선 적이 없었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정상 국가란 점을 부각 선전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며 “향후 첫 부부동반 남북 정상회담 등에 대비한 포석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홀로 남북정상회담에 나온 아버지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얘기다. 정상회담 제안 직전에 이설주에 급작스레 여사 호칭을 부여한 게 간단한 의미가 아니란 해석도 그래서 나온다.

이게 다가 아니다. 여사 호칭을 부여한지 두 달여 만인 지난 15일 북한 조선중앙TV는 평양에서 열린 중국 예술단의 방북 공연 소식을 전하면서 이설주에게 ‘존경하는’이란 수식어를 처음 사용했다. 조선중앙TV는 김정은 동정을 전담해서 전하는 아나운서인 이춘희를 내세워 “존경하는 이설주 여사께서 당과 정부 간부들과 함께 중국 중앙발레무용단의 ‘지젤’을 관람했다”고 전했다.

3월 25~28일 중국을 전격 방문한 김정은을 수행함으로써 외교무대에 퍼스트레이디로 데뷔한데 이은 행보다. 특히 김정은을 동반하지 않고, 이설주가 독자 공개 활동을 벌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설주는 최용해 당 부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간부를 수행하고 행사장에 들어섰다. 평양 로열패밀리의 여인들이 이처럼 공개적인 자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김여정의 행보도 눈길을 끈다. 지난 2월 9일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파견된 북한 고위 대표단의 단원으로 남한을 방문한 김여정은 문재인 대통령과 만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져온 김정은 친서와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하는 내용으로, 사실상 3차 정상회담 개최 제안을 전달한 메신저 역할을 했다.

김여정의 일거수일투족은 한국은 물론 외신의 주목을 받았다. 7년 전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장에서 눈물짓던 때와 크게 달랐다. 세습 권력의 후계자로 등극한 오빠를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던 모습도 찾기 어렵다.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자 중앙당 제1부부장으로 우뚝 선 김여정은 남한 방문을 통해 자신이 북한 정권의 핵심이자 김정은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자리했음을 과시하려 들었다. ‘믿을 건 핏줄 뿐’이란 남매의 의기투합 결과물이다.

북한 매체에 김여정이 처음 공식 등장한 건 지난 2014년 3월이다. 그는 김정은을 수행해 최고인민회의(우리의 국회에 해당) 대의원 투표장에 나왔고, 투표함에 표결하는 장면이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됐다. 당시 ‘노동당 책임일꾼’으로만 불렸던 김여정은 같은 해 11월 노동당 부부장으로 호칭됐다. 당시 25살 나이였다. 아버지인 김정일의 경우 28살인 1970년에 선동부 부부장이 됐고, 고모 김경희는 30살에 국제부 부부장에 올랐다는 점만 봐도 공직 진출을 서둘러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예고편은 몇 차례 있었다. 김정일 사망 이듬해인 2012년 11월 관영 조선중앙TV엔 말을 탄 모습의 김정은이 등장했다. 여기엔 고모 김경희와 함께 김여정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무 설명이 없었지만 메시지는 분명했다. 김정일 시기 여동생 김경희가 국제부와 경공업부 등을 거치며 오빠의 당 사업을 보좌했듯이, 김정은 시대엔 김여정 차례라는 시사였다.

그녀가 탄 백마(白馬)는 이른바 '백두혈통'이라 선전되는 김씨 일가 세습통치의 직계를 상징했다. 김정은이 여정과 친형 정철(건강 문제로 후계에서 밀려남)이 참석하는 정기적 모임을 통해 통치 노선과 노동당과 군부 핵심 인선 등을 숙의한다는 휴민트(humint, 인적 채널을 통해 수집한 정보)도 우리 당국에 입수됐다. 권력의 풍향계를 읽는 데 동물적 감각을 지닌 고위 권력층 사이엔 금세 입소문이 번졌다고 한다. “모든 길은 여정 동지로 통한다”는 건 그녀를 거치지 않고는 되는 일이 없다는 얘기였다. 적어도 평양에선 김여정이 ‘로마로 통하는 길’보다 더 확실한 줄이 됐다.

김여정은 지난해 10월 노동당 7기 2차 전원회의에서 당의 핵심 권력집단인 정치국의 후보위원에 발탁됐다. 28살 나이에 60~70대가 주축인 정치국에 진입했다는 건 파격이다. 고모인 김경희가 64세가 되던 2010년에서야 정치국에 포진할 수 있었던 점에 비춰도 그렇다.

이를 두고 김여정이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는 수준을 넘어 유사시 김정은의 대안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관측까지 나왔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지난해 10월 보도에서 김정은·이설주 부부가 낳은 자녀가 모두 6살 이하로 추정된다는 점을 거론하며 “예견치 못한 통치 권력의 부재 상태에서 북한 왕조를 이어나갈 장치를 마련한 것”이라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백두혈통인 김여정이 ‘다음번 후계자’로 부상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소개했다.

이설주와 김여정은 시누이-올케 관계를 넘어 최고 권력자 김정은을 안과 밖에서 조력하는 역할분담을 하고 있다. 당분간 이설주에게 더 큰 관심이 쏠릴 공산이 크다. 청와대와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이설주에게 ‘여사’ 호칭을 붙이는 쪽으로 결정하는 등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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