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가구 수는 2017년 11월1일 기준으로 2,016만8,000가구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1인 가구의 비율은 전체 가구의 28.6%라고 합니다. 물론 1인 가구 가운데 20-30대는 대부분 부모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생활을 자청한 미혼으로 언젠가 결혼을 통해 다인 가구로 바뀔 가능성이 크지만, 40대 이상의 경우는 별거나 이혼 또는 사별 등을 겪으며 독거(獨居), 즉 홀로 사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통계치를 분석한 언론매체들은 고독사와 자살 등을 포함해 독거로 인해 야기되는 심각한 우려들을 지속적으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모두 100세 시대를 살아가면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던 부부일지라도 특별히 전통적인 효자녀를 두지 않은 경우 언젠가는 사별해 독거할 수밖에 없는 필연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현재 독거 중인 분들의 처지는 다 다르나 현재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렸으면 해서 ‘바람직한 독거’에 초점을 맞추어 다루고자 합니다.

먼저 필자 20대 때의 독거 사례를 보기로 들겠습니다. 또한 필자가 지난번에 ‘인생지도는 왜 필요한가’를 통해 귀족 출신으로 서양의 영적 스승이 되셨던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이 26세 무렵 만레사라는 스페인 시골 마을 어귀의 동굴에서 1년 정도 독거하며 묵상 기도를 하다가 큰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소개를 드렸었는데, 여기에서는 판사 출신으로 출가해 영적 스승이 되셨던 한국의 효봉(曉峰, 1888-1966) 선사와 중국 본토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출가해 영적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엄(聖嚴, 1930-2009) 선사의 멋진 독거에 대해 기술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방자체단체를 포함해 다양한 공동체들의 독거인들을 위한 멋진 프로그램 활성화 노력에 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 20대 시절의 독거

맨 위 두 누나들의 이민, 의사 아버지의 일본 취업으로 인한 어머니의 동행과 두 여동생의 일본 유학, 그리고 1976년 12월 셋째 누나의 결혼을 끝으로, 필자는 불가피하게 1981년 10월 결혼할 때까지 약 5년간 23평 아파트에서 독거(獨居)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 무렵은 1975년 10월 중순부터 평생 스승이셨던 종달 선사 문하에 입문해 참선 수행을 1년간 지속하며 형편없던 2대독자 마마보이에서 그런대로 홀로서기가 가능한 성인으로 변신해가던 때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학부 4학년, 석사 및 박사 과정 중이었던 이 시기 동안 필자는 한결같이 이른 아침 좌선(坐禪) 1시간으로 하루를 열고 마칠 무렵 잠시 낮 동안 해야 할 시급한 일들을 정리하고 등교해 이론물리 연구에 온몸을 던졌으며, 잠자리 들기 직전 잠시 하루를 돌아보며 반성한 후 좌선 1시간으로 하루를 닫았습니다. 아울러 주말마다 스승인 종달 선사께 일주일 동안의 수행을 점검 받았으며 과제가 밀리지 않은 주말 일요일에는 거의 8시간씩 좌선 수행에 몰두하며 자기성찰을 심도 있게 이어갔습니다.

또한 독거를 통해 궁즉통(窮則通), 즉 궁하면 통한다고 생명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기본 요리법도 습득했습니다. 이제 정년이 2년 정도 남았는데 정년 후에는 그동안 식사를 전적으로 담당했던 아내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옛날 기억을 되살려 또는 간편한 요리법들을 새로 익히며 가끔 식사도 담당하려 합니다. 어쩌면 이런 계획은 노년에 다시 독거를 해야 할 상황이 오더라도 별 어려움 없이 홀로 식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주겠지요.

참고로 5년 전부를 잘 견뎌낸 것은 결코 아니며 위기도 있었습니다. 비록 정신적으로는 매우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도중 일시적으로 연구에 집중하다가 잠시 불규칙한 식사로 인해 육체적으로 매우 허약해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매우 절친했던 친구 부모님의 지극한 배려로 친구 집에서 6개월간 머물며 완전히 기력을 회복하고 보다 철저히 독거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박사과정 3년만에 국제 저명학술지에 6편의 논문을 게재하며 무난히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졸업과 동시에 공채를 통해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이 무렵 학업과 함께 선수행도 치열하게 이어가며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중독에서 벗어나 통찰과 나눔이 둘이 아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바탕도 잘 갖추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누구나 독거 초기단계에서 규칙적인 식사와 정신적인 안정을 위한 스승[멘토]과의 정기적인 만남만 잘 유지될 수 있으면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가치 있는 일에 온몸을 던져 몰두하며 원하는 성과를 반드시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 효봉 선사의 목숨을 건 토굴 수행

출가는 대개 10-20대에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판사였던 효봉 선사는 법조문에 따라 내린 재판 판결에 회의를 느끼고는, 어느 날 문득 무단가출해 3년 동안 엿장수로 팔도 전국을 떠돌다가 뜻한 바 있어 38살에 뒤늦게 금강산 석두(石頭, 1882-1954) 선사 문하로 출가하였습니다. 밤잠을 줄여가며 눕지도 않고 앉은 채 공부를 치열하게 이어가다보니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首座)’라는 별칭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출가 후 5년이 지났는데도 지금까지 참구하던 ‘무(無)’자(字) 화두(話頭)를 타파하지 못한 선사는 마음이 조급해지자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뒤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밖으로 내고, 음식물을 담은 그릇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창문 하나만을 낸 토굴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1930년 봄 대중들께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다시는 이 토굴 밖에 나오지 않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하고는 출입문을 밖에서 흙으로 발라 봉쇄하게 하였습니다. 다만 이때 대중들에게 하루 한 끼의 공양만을 들여보내 줄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이후 치열하게 화두 참구 수행을 이어가다가 드디어 1931년 여름 어느 날 아침 ‘무’자 화두를 타파하고 스스로 토굴 벽을 발로 차 허물고 세상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읊은 오도송(悟道頌)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 소식을 뉘라서 알꼬?/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그리고 다음과 같은 임종게(臨終偈)도 남기셨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말/ 모두 다 군더더기이니라./ 만일 오늘 일을 묻는다면/ 달이 천강(千江)에 비친다고 답하리.”

참고로 효봉 선사는 조계종 초대종정과 조계총림의 초대방장을 역임하시며 한국불교 발전, 특히 수행풍토 진작에 한 획을 그으셨습니다.

◇ 성엄 선사의 폐관 수행

중국 강소성이 고향인 성엄 선사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전란과 배고픔 때문에 13세에 출가했으며 1949년 대만으로 건너가 10년 간 군 복무를 하다가 30세에 다시 재출가하며 2년 간 엄격한 스승 문하에서 치열하게 수행을 이어갔습니다. 그후 ‘나는 나 자신만의 해탈을 위해 수행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산중에서 6년 간 폐관 수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때 좌선뿐만이 아니라 시간을 쪼개어 방대한 양의 불경과 선종 어록들을 정독하면서 불교 경론과 원리들을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저술 작업을 병행하였습니다. 그러다 폐관 후반기에 그의 저서와 기고문들을 접한 일본 유학을 다녀 온, 한 거사가 가끔 일본불교에 관한 책들을 다수 전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일본어를 독학하며 이 책들을 읽다가 불교학이 활발히 살아있는 일본불교를 접하게 됩니다.

그후 끌리는 바가 있어 폐관 수행을 마치고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1969년 일본으로 건너가 6년 뒤 박사학위까지 취득하는 동시에 일본 선사 문하에서 선수행을 이어가며 인가를 받는 등 선교(禪敎)를 겸비한 선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오래 폐관 수행한 승려들은 당연히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여기나, 뚜렷한 목적 없이 독거하며 폐관 수행을 하는 것은 교도소에서의 독방 생활과 다름이 없다며 남이 한다고 함부로 폐관 수행을 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그는 오늘날 세계적인 수행공동체로 주목받고 있는 법고산사를 개산하여 당시 불모지였던 대만불교 중흥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1976년부터는 활동영역을 미국까지 넓혀가며 왕성하게 포교활동을 이어갔으며 입적 후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영적 스승의 한 분으로 추앙받아 오고 있습니다.

참고로 사실 한국에도 ‘무문관’ 6년 폐관 수행 제도가 있는데 대부분 얼마 견디기 못하고 야반도주하는 일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직지사에 주석하셨던 관응 선사라는 분이 제대로 무문관 수행을 마치시고, 깊은 통찰 체험을 바탕으로 선교를 겸비한 존경받는 선사의 삶을 올곧게 사셨다고 합니다.

◇ 독거인을 위한 활성화 노력

얼마 전 필자는 지인인 KBS아트비전 영상그래픽 팀장인 김성태 서예가의 재능 나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어 서울시청 노숙인시설팀과 함께 지난 7월말부터 모두 20회에 걸쳐 서울 시내 노숙인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기 위해 ‘노숙인 재활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캘리그라피 강의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희망에 찬 첫 수업 소감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노숙인 희망그라피 서부교육장인 제 작업실에서의 첫 수업. 먼저 순두부로 저녁을 같이하고 수업을 했습니다. 이론을 간단히 설명을 하고 수업에 들어선 순간, 선 하나 긋는데 같이 수업을 받는 시설의 관계자들보다 더 깊은 진중함에 놀랐고, 곧잘 따라하시는 할아버지의 연세가 91세라 놀랐습니다. 캘리그라피의 희망이 보이는 첫 수업이었네요.” 

한편 이 소감을 접하고 필자는 그에게 오늘날의 음성꽃동네를 있게 한, 최귀동 할아버지의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다!’라는 심금을 울리는 한마디[一轉語]를 전해드리면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 보다 많은 노숙인 분들께서 자신을 돌아보며 남은 여생餘生 동안 뜻 깊은 인생여정人生旅程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시기를 간절懇切히 염원念願드립니다.”라고 답해 드렸습니다. 참고로 올해 12월 중순 무렵 노숙인 분들의 삶의 체험이 담긴 감동적인 캘리그라피 작품 전시회도 서울시가 계획하고 있다고 하네요.

한편 양천구 보도자료에 따르면 양천구청이 최근 나비남(50대 독거남)의 자살률이 높아지고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지난 해 3월 전국 최초로 나비남 지원을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하였으며, 8월부터 ‘50스타트 센터’에서 독거남들의 자연스런 만남을 유도하는 바리스타 교육프로그램 운영 등을 포함해 나비남들이 필요로 하는 각 분야의 전문상담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운영한다고 합니다.

끝으로 언젠가는 누구나 선택의 여지없이 독거할 수밖에 없는 100세 시대를 맞이해 멋진 해결 방안의 하나로 필자가 속한 선도회에서는 종교를 초월해 혼자이든 부부이든 또는 가족 모두이든 노년까지 함께 하며 ‘생수불이(生修不二)’, 즉 일[生業]과 수행(修行)을 병행할 수 있는 다목적 수행공동체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전공분야: 입자이론물리학)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1989년 9월부터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강대 물리학과장, 교무처장, 자연과학부 학장을 역임했다.
한편 1975년 10월 임제종 양기파의 법맥을 이은 선도회 초대 지도법사이셨던 종달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스승이 제시한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이후 지금까지 선도회(2009년 사단법인 선도성찰나눔실천회로 새롭게 발족)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한편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께 두 차례 입실 점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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