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북한 주민 보건·의료 실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알람이 계속 울리고 있다. 김정은 체제 들어 경제사정이 호전됐다거나, 핵 개발 노선에서 경제개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주민들의 민생 가운데 기본적인 요소로 꼽히는 보건·의료에는 계속 구멍이 뚫려있다는 우려다. 특히 취약계층으로 불리는 임신·출산기 여성과 영유아의 건강 상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최근 공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북한 영유아 및 아동 지원 사업 네트워크 구조와 발전 방안’ 보고서에는 이런 점이 잘 드러나 있다. 보고서는 유엔인구기금(UNFPA)의 ‘2017 세계인구현황보고서’를 인용해 북한의 모성사망률이 신생아 10만명 당 82명에 달해 남한의 11명보다 약 8배 가량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 2008년 10만명 당 77.2명에서 더 높아진 수치다. 모성사망률은 임신이나 출산 직후 관련된 질병으로 여성이 사망하는 비율을 말한다.

이달 초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는 남북 당국 간 보건·의료분야 회담이 열렸다. 양측은 보건·의료 분야 협력이 남북한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전제조건이라는 점에 의견 접근을 이루고, 결핵과 말라리아 등 전염병의 진단 및 예방·치료에 힘쓰기로 합의했다. 지난 9월 열린 평양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보건·의료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한데 따른 후속조치가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회담에서는 남북한이 전염병 유입과 확산 방지를 위해 서로 정보교환과 대응체계 구축 문제들을 협의하고 기술협력을 비롯한 대책을 수립하기로 하는 등 주로 방역체계와 감염병 예방과 대처에 초점이 맞춰졌다. 북한의 열악한 보건·의료 시설을 지원하거나 개선하기 위한 문제는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만성적인 경제난에 시달리다보니 약품이나 의료 장비가 턱없이 부족해지고, 제대로 된 방역체계를 갖출 능력이 없어졌을 것으로 판단한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과 국제사회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의료지원을 받아왔다. 사스와 조류인플루엔자(AI),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나 질병이 창궐할 때마다 국제구호단체와 우리 당국·민간이 약품이나 장비를 지원했다. 20년이 됐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게 우리 당국의 평가다.

북한의 의료체계는 사실상 와해상태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정은 체제 들어 평양에 일부 특권층을 위한 새 의료시설이 세워졌지만 일반주민들이 이용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란 얘기다. 또 지방의 경우엔 이런 혜택과 거리가 멀다. 경제난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의료보건체계의 마비는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다. 실제로 수술환자들에게 투입할 마취제나 주요 약품이 없어 고통이 심화되고 수술후 환자의 사망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북한이 이런 사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고 개선책을 마련하거나 외부 지원을 요청하는 대신 체제유지나 선전을 위한 겉치레식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의료보건정책의 특성은 크게 무상치료제와 의사담당구역제, 고려의학(한의학) 중시정책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자력갱생’을 모토로 하는 북한식 사회주의 의료보건체계는 그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져있다는 지적이다.

북한의 제약공업만 보더라도 여타 산업과 마찬가지로 극도의 자립만을 강조함으로써 외부의 선진기술과 원료 도입의 길이 막혀 있다. 김일성의 이른바 의료보건 분야에 대한 교시도 북한을 외딴길로 모는데 한몫했다.

김일성은 1966년 10월 20일 보건성 간부들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의학은 예방의학이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김일성은 “제약공업이 아직 발전되지 못한 조건에서 약초재배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면서 “모든 보건기관들에서 약초를 많이 심어 생약에 대한 수요를 자체적으로 보장하라”고 강조했다. 한 탈북 의료인은 “지방 병원의 경우 의사와 간호사들이 약초를 재배하거나 산으로 직접 캐러다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구조적인 의료체계 미비와 함께 의사들의 부정부패 역시 문제다. 북한은 1980년 제정한 보건법에서 ‘보건일꾼들은 전체인민을 건강한 몸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 참가하게 하는 영예로운 혁명가’라고 규정, 의사들에게 도덕성에 입각한 활동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식량난 등 생활고 속에서 의사들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있다. 진료기회를 얻기 워낙 힘들다보니 환자들의 입·퇴원이나 각종 진단서의 발급, 의약품 밀반출 등 부정사례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북 의료지원은 1994년 김일성 사망과 이듬해 대홍수로 망가진 북한의 의료체계를 돕는데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2004년 4월 평북 용천군에서 발생한 열차 폭발사고 구호과정에서 대한적십자사나 우리 민간단체의 대북 의약품지원은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북한은 우리 국민들의 정성이 담긴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남위협과 도발에 치중하는 행태를 보여 대북지원 단체들의 속을 태우게 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감염병이 발생하면 이를 대남비방과 반정부 선동의 호재로 활용하고 있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1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를 넘어 귀순한 북한 경비병 오청성 씨는 총상 치료 중 나온 27cm에 달하는 기생충으로 충격을 던졌다. 구충제 몇 알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북한 당국은 방치했다. 처우가 좋다는 JSA 병사가 이 지경이라면 119만 북한군 병사나 일반 주민의 경우 더 심할 게 분명하다는 지적이다. 대한의사협회는 “남북통일 시 기생충 문제가 보건·의료 분야의 상당한 위협요소가 될 것”이란 점을 경고하고 있다.

남북 보건·의료 협력이 단지 감염병 예방이나 공동대책 수준이 아니라 직접 북한 주민들의 열악한 상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긴급 구호’ 형태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특히 기생충과 결핵 등 시급하고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부터 접근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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