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하노이에서 개최된 2차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이 대외개방의 문호를 열어 보일지 관심을 끌고 있다. 핵 협상의 점진적 타결 흐름과 평양~워싱턴 간 관계개선 움직임과 맞물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설지 모른다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들이 이미 장마당 경제를 통한 생존에 익숙해진데다, 외부세계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정보를 접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당과 당국 차원의 정책결정 수위에 따라 북한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을지 판가름 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북한의 경제 실상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아이템은 장마당과 휴대폰, 택시로 압축될 수 있다. 김정은 체제 들어 북한을 굴려 가는 세 축이라 할 만하다. ‘노동당보다 장마당이 믿음직하다’는 말에서 느껴지듯 시장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의존도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이어 570만대 이상 보급된 '손전화'를 두 번째로 꼽는다면, 택시는 최근 들어 가세했다고 볼 수 있다. 택시의 본격 등장과 성업은 주민 이동 증가와 유통망 확대의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택시는 사실 북한 주민들에게 매우 낯선 교통수단이었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개개인의 업무나 이동을 위해 차량과 기사가 배정되고, 유류 같은 자원이 쓰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 노동당과 군부 간부 등 핵심인사가 아닌 다음에 이런 호사를 누리는 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 국가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 통치 시기, 택시는 교통수단으로 매우 제한적인 역할을 하는데 머물렀다. 외국인 방문객이나 관광차 방북한 인사들의 경우, 사실상 감시원 역할을 하는 안내원이 타고 있는 북측 제공 차량(승용차나 버스)을 이용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평양에 상주하는 외국인이나 국제기구 요원, 조총련 간부 등이 전화로 택시를 불러 탑승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지난 2012년 김정은 체제가 등장하면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한 관영TV 보도나 방북 관광객, 서방 인사들이 촬영한 영상 속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택시가 눈에 띄게 늘어난 대목이 드러난다.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평양에는 현재 2,500대 정도의 택시가 운행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2016년 5개 회사가 1,500대 정도의 택시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던 것에 비해 크게 늘어난 건 분명해 보인다.
 
평양을 비롯한 북한 주요 도시에 택시가 늘어났다는 건 방북인사의 전언이나 중국의 유튜버들이 촬영한 평양 현지 영상에서도 확인된다. 순안공항이나 고려호텔 같은 외국인이 주로 오가는 지역 뿐 아니라 평양역처럼 북한 주민들이 많은 지역에서도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영상자료엔 공연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를 데리고 바이올린을 챙겨 들고 택시를 타러 뛰어가는 여성의 모습이 담겨있기도 하다.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택시를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택시요금은 기본거리 4㎞에 2달러이며, ㎞당 0.5달러가 추가된다고 한다. 10㎞를 타게 되면 5달러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는 얘기다.

북한에서 택시가 늘어나는 건 이제 되돌리기 힘든 상황이 돼버렸다. 무엇보다 먹고살 만한 중상류층 그룹에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고급 아파트와 주말 외식, 스마트폰 등으로 삶의 질을 챙겨온 이들이 이동수단으로서의 택시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평양의 새 쇼핑시설인 광복거리상업중심 앞에는 구입한 생수나 쌀, 가전제품 등을 택시 트렁크에 싣는 주민들의 모습이 이어지고 있다. 장마당을 통한 돈벌이나 뇌물 등으로 지갑 사정이 넉넉해진 일부 계층에겐 택시비가 큰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평양과 주요 도시 뿐 아니라 시골 장마당에서도 택시는 성업 중이다. 북중 접경지역을 주기적으로 방문해 북한의 변화를 분석해온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지방도시나 중국과의 변경지역에서도 영문으로 ‘TAXI’라고 쓰인 표시를 달고 장마당을 오가는 차량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연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올해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를 어떤 방향과 방식으로 대응해 나갈 것인지 조율했다. 이를 바탕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2차 북미정상회담 뿐 아니라 ‘서울 답방’으로 불리는 4차 남북정상회담의 구도를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지 장고를 거듭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은은 지난해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미국과의 70년 적대관계를 넘어서는 상징적인 악수와 함께 국제사회를 향해 무게 있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는 앞으로의 행보가 과거와는 크게 다를 것이란 약속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2차 북미정상회담을 치렀다. 향후 김정은이 ‘완전한 비핵화’ 약속을 이행하고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놓는다면 대북제재 해제와 경제지원을 통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공산이 크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미국을 기만해 핵 보유국가로 어물쩍 자리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면 오산이란 얘기다.
 
가수 신형원이 불러 1990년대 중반 히트를 친 ‘서울에서 평양까지’는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을 택시 요금에 비유한 노래 가사가 인상적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 요금 오 만원/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가는 곳 없는데/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가’라는 구절은 가깝지만 분단으로 오가지 못하게 된 남북 현실을 절절히 노래한다. 지금의 요금체계로 보더라도 20만원 조금 넘는 돈을 주면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평양으로 달려가 옥류관 냉면을 맛 볼 수 있다. 남북을 가로지른 휴전선은 서울과 평양을 말 그대로 러시아(구 소련)보다 멀게 만들었다. 북미정상회담에 이어 남북정상회담 등을 통해 상호 화해와 교류협력의 흐름이 이어져 평양을 반나절 만에 다녀올 수 있는 날이 다가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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