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 칼럼니스트
하도겸 칼럼니스트

3.1운동은 우리가 독립국이며 홍익인간의 이념을 지닌 민족이라고 선언했다. 민족대표 다수가 최초의 민족사학인 보성학원 관계자이며 여기서 ‘독립 선언문’ 3만5,000부 전량이 인쇄되었다. 학교가 경영난에 처하자, 간송 전형필(1906~1962)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이런 줄거리를 가지고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간송이 일제강점기 하에서 지켜낸 국보 6점과 보물 8점이 공개한 ‘간송특별전 대한콜랙숀’을 개최한 듯하다.

2013년 설립된 간송미술문화재단은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갈 뻔했던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을 1935년 기와집 20채 값의 거금을 주고 구입한 이야기, 세계적인 골동품상 야마나카 상회에 맞서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을 경매로 손에 넣은 이야기, 친일파의 불쏘시개가 될 뻔한 겸재 정선의 ‘해아전신첩’에 얽힌 이야기 등등.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지만, 성북동 보화각의 길고 긴 줄 끝에 서 있었던 간송팬이라면 이미 다 아는 식상한 이야기이다.

1938년 개관 당시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의 ‘보화각’이라 했다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됐다. 1971년부터 42년간 봄가을 85차례나 열린 주옥같은 전시들은 우리 미술사학계를 개척한 ‘간송학파’를 배출했고 ‘진경시대’를 국민에게 알렸다. 그러나, 지난 5년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개최한 전시들은 상업적이라는 비판 아래 오랜 간송팬들의 등을 돌리게 한 면도 있다. 문화보국과 구국교육을 한 간송이 살아 있었다면 사랑할 만한 전시였는지 궁금하다.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 대한콜랙숀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 대한콜랙숀

5개로 짜여진 전시공간 가운데 첫 번째 ‘알리다’에서는 지난 DDP 나들이에서 선보인 주요 유물 15점을 디지털화 했다. DDP에서 보여준 유물이 아니라 간송의 문화재 사랑이나 그가 사랑한 유물들이 대상이었어야 했다. 두 번째 ‘전하다’에서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폐교위기에 처한 보성학교를 땅을 처분해 인수한 이야기가 아닌 보성학생들이 받은 간송의 정신을 전해야 했다. 세 번째 ‘모으다’에서는 보화각이 탄생한 이야기가 아니라 간송이 수집한 문화 정신들의 단편들이라도 모아야했다. 네 번째 ‘지키다’에서는 경성미술구락부가 아닌 일제 강점기 문화재 지킴이들의 면면을 통해서 지켜야 할 불굴의 정신을 다뤄야 했다. 마지막 ‘되찾다’에서는 존 개스비의 컬렉션이 아니라 오늘날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문화재에 대한 애호심을 되찾게 하는 내용을 구현했어야 했다.

미술관이나 내세울 만한 보물이 부족한 박물관들은 체험은 물론 설치예술을 포함하여 인터렉티브한 다양한 전시로 관객을 유인하고 고객만족을 늘 염두에 둔다. 이에 반해 국보 등이 많은 박물관은 짜임새 있는 스토리 전개 없이 몇몇 명품과 그에 얽힌 에피소드로만으로 전시를 구성하고 무한 반복시키는 것 같다. 마치 다시 한번 기회를 줄테니 또는 좀 다른 각도로도 보여 줄테니 비싼 돈내서라도 와서 보라는 식의 ‘갑질’이 아닌가라는 날선 평가도 가능하다.

지난해 4월 간송의 장남이 별세하면서 손자가 운영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3.1절과 간송을 기념한 ‘대한의 미래를 위한 컬렉션’이라면 상속세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국가 기부가 정답이 아닐까 싶다. 물론 국가에서 사례와 상훈 등으로 독립유공자와 같은 충분한 예우를 해야 한다. 전시를 마치고 나와 체험한 VR 속에서 학처럼 고고하면서도 자유롭게 대한민국 전역을 날던 간송 선생님을 봤다. 간송 선생이라면 지금 어떻게 할까? 이 마음이 없다면 ‘명품만 있고 간송은 없었다’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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