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 80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전 국방홍보원장
김준범.
80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전 국방홍보원장

요즘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말을 보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도 이젠 옛말이 된 것 같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독재자의 후예’ 공방만 해도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자리에서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진짜 독재자의 후예 김정은에게는 말 한마디 못하니까 여기서 대변인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맞받아쳤다.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어디서도 황교안 대표를 겨냥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때문에 황교안 대표는 그 말에 굳이 대꾸할 필요가 없었지만, 끝내 역공을 취하고 말았다. 그것도 같은 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 3월 국회 교섭단체 연설에서 파문을 일으킨 고약한 발언, 즉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말을 다시 꺼내 든 것이다. 그러자 정치권에서는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왔다. 

황교안 대표의 말이 보다 강경해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27 전당대회 이후부터다. 검사출신으로 박근혜 정부 법무장관·국무총리에 이어 예기치 않게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올랐던 그는 본래 조용한 성품에다 고운 말만 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통했다. 절제된 언어와 품격의 아이콘으로 평가될 만 했고 ‘교장 선생님’ 같은 모범생 이미지가 강했다. 낮은 톤의 저음 목소리, 교회 목사 같은 걸음걸이 등 어디에서도 억세고 과격한 이미지를 연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제1야당 대표로 선출된 뒤부터 그의 말은 갈수록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4.3 재·보궐 선거를 기점으로 국회 신속처리 대상(패스트 트랙)법안 저지에 실패한 뒤 장외 투쟁에 돌입하면서 그의 말은 한층 공세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문재인 정부와의 전투’를 선포했던 그는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의 무릎을 꿇게 만들겠다’며 수위를 한층 높였다. 그러다 보니 그의 말에서는 증오심과 적개심이 묻어난다는 세간의 평까지도 듣는다. 

그의 말은 왜 이렇게 독해지는 것일까? 몇 가지 추론 가운데 하나로 당내 기반이 취약한 황 대표의 굳건한 대권욕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법무장관에서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3단계를 초고속으로 달성한 신기록의 주인공이다. 그 때 이미 권력에 눈을 뜨면서 대권 도전의 기회를 살폈을 것이다. 대통령이 되려는 그의 권력의지는 자신의 신앙처럼 굳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오직 내년 총선과 3년 후 대선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다. 당내 기반이 없다시피 한 정치 초년생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당내 갈등을 해소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정당을 이끌어가기보다는 장외로 나가서 지지 세력들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과 당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교과서적인 정책 대결 보다는 극우세력과 보조를 같이 하며 문재인 정부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경원 원내대표와 함께 만면에 미소를 띠며 지지 세력을 향해 손을 흔들며 문재인 정부 비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장외투쟁에 나선 한국당 의원들의 얼굴을 보면 하나같이 밝고 즐거운 모습이다. 국회에서 농성할 때나 지방을 순회할 때도 보면 마치 야유회나 단합대회에 나온 사람들의 표정 같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후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 숨죽이며 지내왔던 질곡의 시간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의 말이 거칠어지고 험악해지는 두 번째 이유는 장외정치를 통해 얻은 경도된 자기 확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명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것인데, 이는 본인의 주장과 같은 정보만 보고, 들음으로써 기존의 신념을 더욱 강화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황교안 대표는 몇 주째 장외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지지 세력들과만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도취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회의원 몇 선 이상이면 누구나 겪게 되는 확증편향 효과를 황교안 대표 역시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특히 정치경험이 없는 그가 당원들만 모이는 집회에 가면 부지불식간에 분위기에 빠져들어 예기치 않게 격한 발언을 토로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 2월 당 대표 선출이후 몇 달 동안 그가 한 말을 분석해 보면 막말의 대명사로 알려진 홍준표 전 대표 보다 이제는 별로 나을 게 없다는 평을 얻고 있다고 한다.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유증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대구·경북지역 민심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고정 지지층을 더욱 결속시킬 수 있는 확신을 줘야 하는데, 바로 황교안 대표의 대정부 강성 발언이 먹혀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콘크리트 지지층 40% 정도를 확실하게 구축할 때까지 전략적이고 계산된 대여투쟁 발언수위를 조절해 갈 필요가 있다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하지만 황교안 대표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문재인 정부를 향해 아무리 독설과 비난을 퍼부어도 집토끼 단속 이상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어차피 확장성에 뚜렷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70년대 유신시대나 80년대처럼 간첩 조작사건이나 만들고 좌경용공 세력 발본색원하던 시대가 아니다. 공안검사들이 무소불위로 북한이라는 허깨비를 만들어 겁박하던 시절도 한참 지났다. 
 
자유한국당은 지금도 70~80년대 간첩 잡는다며 온 사회를 공포분위기로 몰아가던 시대의 안보관과 사고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자유한국당이 취하고 있는 극우보수 노선으로는 결코 합리적인 중도 보수층을 끌어들일 수 없다. 한국당의 이념성향이나 주장들을 보면 태극기 부대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더 이상 확장성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황교안 대표의 언행을 자세히 뜯어보면 마치 차기 대선 후보가 다 된 듯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지금 한국당내 노련한 백전노장들에 의해 어떤 용도로 길러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상초유의 탄핵사태로 박근혜라는 주군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은 지금 허탈과 분노 속에 현 정권에 대한 증오와 저주,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자유한국당은 어차피 내년 총선까지 대여투쟁의 고삐를 줄곧 놓치지 않고 강경노선을 가야 하는데, 황교안을 그 선봉장으로 내세우고 있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황교안 대표의 개인 이미지가 부서지든 말든 그것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오직 당의 선명성과 투쟁성을 통해 자유한국당의 존재감을 확실히 부각시켜 주기만 하면 내년 총선에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황교안을 차기 대선후보로 밀어주느냐의 여부도 그 때 가서 정할 일이고, 일단은 내년 총선이라는 토끼사냥에 최대한 이용하는 게 급선무라고 보는 것 같다. 사후의 논공행상은 그때 가도 늦지 않을 테니 말이다. 대권을 향한 황교안 대표의 집념이 신앙처럼 살아있는 한, 그의 말은 더욱 독해지고 강경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증오와 저주, 적개심 같은 혐오·악감정이 담긴 언어사용만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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