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80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전 국방홍보원장
김준범.
80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전 국방홍보원장

지난 15일 동해안 삼척항에 정박한 북한 목선은 간첩선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초라했다. 길이 10m, 폭 2.5m, 무게 1.8톤에 28마력의 엔진이 장착된 나무 배였다. 그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타고 4명의 북한 주민이 귀순을 해왔고, 이 중 2명은 본인 의사에 따라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한 파장은 열흘이 지나도록 잦아들지 않고 있다. 유력 일간지는 24일 정부와 군 당국이 북한 목선의 귀순사실을 파악한 초기단계부터 조직적으로 이 사실을 은폐, 축소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북한 소형 목선이 속초항에 들어왔다는 신고가 접수된 15일 오전 직후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이 합참 지하벙커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다고도 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군과 청와대는 처음부터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고도 국방부가 17일 문제의 거짓말 발표를 한 셈이 된다. 초기부터 사건의 진상을 가급적 축소하고 숨기려다 보니 발표할 때 북한 선박의 ‘입항’을 ‘표류’로, ‘삼척항’을 ‘삼척항 인근’으로 애매하게 표현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3가지 정황증거는 확실해 보인다. 군의 경계실패와 허위보고, 그리고 축소·은폐 의혹 등이 그것이다. 경계실패와 허위보고는 군이 절대 해서는 안 될 행위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전쟁 금언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이번 북한 목선사건도 민간인의 신고를 받고서야 군이 출동했다는 점에서 경계실패를 여실히 드러냈다. 목선을 타고 내려온 4명의 북한 선원들은 무려 50시간 가까이 남쪽 해상에서 머무르는 동안 군의 어떤 감시망에도 노출되지 않았다. 귀순자는 서울에 사는 이모에게 연락하겠다며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했다. 일련의 상황이 2012년 중부전선에서 발생한 ‘노크 귀순’과 닮았다는 점에서 ‘해상판 노크귀순’으로 부르기도 한다.

6.25 이후 군의 경계실패 사례는 수 없이 많다. 군·경 보다는 순수 민간인에 의한 신고 건수가 훨씬 많았다. 경계실패에 따른 문책 인사나 징계조치도 있었지만 유야무야 넘어간 경우도 많다. 노크귀순에 대해서도 당시 정부는 해당 군단장·사단장등 최고위 지휘관의 보직을 해임하는 등 징계조치를 단행한 바 있다. 

1990년대 후반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1996. 9. 18.)과 △양양 잠수정 침투사건(1998. 6. 22.), △여수 반잠수정 침투사건(1998. 12. 18.) 등에서도 여수를 제외한 나머지 두 곳, 강릉과 양양에서는 민간인의 신고를 받고 군이 출동하는 경계실패를 드러냈다. 강릉에서는 택시 운전사가, 양양에서는 꽁치잡이 어선이 먼저 신고를 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11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에도 맨 먼저 신고한 사람은 군·경이 아닌 민간인이었다. 그해 ‘1.21 사태’ 당시 청와대 기습사건에 동원됐던 124군 부대 120명이 동해안 지역에 침투했다. 공비들은 8개 조로 나뉘어 남한 내 민중봉기 유도를 위해 주민들을 대상으로 세뇌공작을 벌였지만 군은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3일이 지난 다음 주민의 신고를 받고서야 출동, 대간첩대책본부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작전에 돌입했다. 

이명박 정부 초기 백령도 해상에서 발생한 천안함 격침사건(2010. 3. 26.)도 화려하게 포장은 했지만 대표적인 경계실패 사례로 평가돼야 한다. 사고 당시 천안함은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 잠수정의 어뢰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전장 88m의 1,200톤급 초계함(PCC)인 천안함은 함포·어뢰·음파탐지기·대함 미사일 등으로 중무장한 상태였으나 북한의 어뢰공격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했다. 분명한 경계 실패였다. 

이 사고로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고 58명이 구조됐다. 정부는 이들 46명을 ‘천안함 46용사’로 명명하고 서훈했지만 엄밀히 말해 격전 끝에 산화한 전쟁 영웅은 아니다. 더욱이 경계작전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의 어뢰공격을 받았다면 그만큼 경계태세가 허술했다는 반증이므로 오히려 문책을 받아 마땅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번 사건을 통해 군이 가장 뼈아프게 반성할 점은 뿌리 깊은 허위보고, 즉 거짓말 관행을 시급히 떨쳐버리는 것이다. 사실대로 밝히고 잘못이 있으면 책임을 지고, 개선할 점이 있으면 고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군이 발전한다. 지금 당장 나의 책임을 모면하고자 다음 세대에게 나쁜 유산을 넘겨줘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이 꼬이는 원인은 처음부터 진실을 밝히지 않고 숨기거나 축소, 왜곡하는 데서 비롯된다. 사실대로 말할 경우 그에 따른 응분의 책임이 따르고, 그러자니 인사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북한 목선 귀순사건만 해도 15일 해경의 최초 상황보고가 청와대와 국방부·합참 등에 접수됐을 때 여과 없이 그대로 밝혀졌더라면 이런 의혹이나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의 지적은 백번 옳다고 본다. 박지원 의원은 “해경이 청와대에 핫라인으로 보고했으면 그 때 발표하고 강하게 조치하면 되는 건데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이 벙커에서 회의하고…. 거기서부터 틀어졌고, 속이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모든 일은 속이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고, 그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마련이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 군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건·사고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군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쪽에 피해가 적을까를 꼼꼼히 따진 후 보고서를 만드는 게 관행처럼 내려 왔다. 그러다 보니 허위보고는 당연한 수순이고, 거짓말이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군대문화가 뿌리내린 것이다.  

5.18 광주민중항쟁도 군이 처음부터 사실대로 밝히고 국민의 이해를 구했더라면 오늘날 이런 터무니없는 왜곡과 인식의 혼란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군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을 때는 진실도 숨기고 왜곡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진 나머지 없는 사실을 조작하고, 있는 사실을 없애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다.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될 집단이 있다. 군인·성직자·교육자 그룹이 그들이다. 이들에게 정직, 즉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는 목숨과도 같다. 그런 집단에서 거짓말이 횡행하게 되면 그 조직은 오래 갈 수 없다. 어떤 경우에도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통일부나 국정원 등에서는 이번 사건이 남북대화의 불씨를 살려내는 데 악재가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4명 중 2명을 이례적으로 빨리 북한에 돌려보냈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군은 사건을 정직하게 보고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했어야 한다. 두 번에 걸친 국방장관의 대국민 사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크게 와 닿지 않는 것은 타이밍과 일의 순서를 잘못 조율한 미숙함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 군의 가장 나쁜 폐습 중의 하나는 창군 이래 관행처럼 굳어져 온 허위보고 문화라고 본다. 사건이 발생하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일단 숨기고, 축소·왜곡하고 보는 부정의 문화가 팽배해 왔었다. 그 밑바탕에는 책임회피와 보신주의가 깔려 있다. ‘좋은 것은 나에게, 나쁜 것은 너에게’ 풍조가 만연한 군대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진실을 밝혀 지금 회초리를 맞을지언정 거짓말로 나중에 몽둥이를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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