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읽었던 수많은 책들 중 법정 스님의 『무소유』다음으로 내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책은 어떤 것일까? 중학교 다닐 때부터 시와 소설 등 문학 작품 읽기를 좋아했고, 대학에서는 영문학, 대학원에서는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읽었네. 10여 년 전부터는 장자와 노자, 불교 관련 책들도 즐겨 찾고 있으며, 사진 공부하면서는 사진과 예술 관련 책들도 많이 읽고 있지. 하지만 공식적인 노인이 된 지금 내가 살아온 긴 여정을 뒤돌아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각과 사유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계속 내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책은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인 것 같네.

우리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중반 암울했던 유신시대에 출간되었던 이 책들은, 어렸을 때부터 학교나 언론을 통해 우리들의 머릿속에 일방적으로 주입되었던, 그래서 누구도 회의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되는 진리나 상식으로 믿고 통했던, 해방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가치와 규범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 지적 해방의 단비이었네. 우리들은 리영희 교수의 글들을 읽으면서 반공, 북한, 미국, 중국, 베트남 등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이 국가 권력과 획일적인 공공교육에 의해 얼마나 크게 왜곡되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지. 당시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많은 상식들이 일종의 미신과 우상에 지나지 않은 죽은 지식이라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고.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어두운 장막을 걷어내고, 정치적, 사상적 우상의 가면을 스스로 벗어 던지는 의식화를 통해 지적 희열감을 만끽했던 청춘, 그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니…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는구먼.

리 교수는 이 책들에서 우리들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낡은 상식들을 버리라고 말하네. 왜냐하면 그 상식이란 게 사실 허위의식이거나 미신이기 때문이야. 그는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우상들의 본질을 꿰뚫는 새로운 눈을 가지라고, 그래서 그 눈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라고 충고하네. 그래야만 당시 우리 사회가 은폐하고 있는 진실들을 똑바로 볼 수 있고, 거짓과 위선을 찾아내 폭로할 수 있다는 거야. 이게 어디 40여 년 전에 대학을 다녔던 우리들에게만 타당한 충고이겠나. ‘지금 여기’ 청춘들에게도 필요한 가르침일세. 나는 이 순간에도 『우상과 이성』의 머리말을 마음에 새기며 조심스럽게 글을 쓰고 있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없다.”

2005년에 출간된 리영희 교수의 회고록인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다시 읽고 있네. 야만의 시대에 맞서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한 지식인의 삶의 궤적과 사상 편력을 질문자와의 비판적 토론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지. 1929년 평안북도 온산에서 태어나 20대까지는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한 청년이 유엔군 연락장교, 기자, 교수로 활동하면서 어떻게 우리 사회의 제반 모순을 인식하게 되었는가를, 그리고 그 모순들에 맞서 싸우면서 어떻게, 기능적인 전문가가 아니고, 시대의 고통을 민중과 함께 고민하는 ‘지식인’의 한 표상으로 우뚝 서게 되었는가를 담담하게 구술하고 있는 책이야. 그 책 268쪽에 나오는 리영희 교수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오늘 편지를 마치고 싶네. 점점 이전 정부들과 별 차이가 없어지는 문재인 정부를 보면서 실망하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닌 것 같네. 리 교수 말대로 슬픈 일이지만 어찌하겠나. 그게 우리 국민들의 한계인 것을…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는 미국 독립운동조차 단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남북전쟁이라는 어리석은 짓도 했어요. 이런 실증적인 역사적 근거와 나 개인의 철학적 고찰로 볼 때, 결국 인간집단은 실패를 거듭하는 괴로움 속에서 다음에 올 실패의 괴로움을 다소나마 감소하는 정도의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집단이 이렇게 많은 목숨과 고통과 설음을 겪고서야 다음에 올 운명에 대해서 조금씩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아닌가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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