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매체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읽는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을 공개했다. /노동신문-뉴시스
북한 매체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읽는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을 공개했다. /노동신문-뉴시스

시사위크=정계성 기자  북한 외무성 권정근 미국담당 국장은 “협상을 해도 조미가 직접 마주 앉아 하는 것인 만큼, 남조선 당국을 통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권 국장은 “북남 사이 다양한 교류와 물밑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광고하는데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도 했다. 그간 “대화를 하고 있다”며 북미협상의 중재자를 자처했던 문재인 정부를 민망하게 만든 말이었다.

통일부는 물론이고 청와대까지 말을 할 수 없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조속한 북미대화,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점만 말하겠다”고 했다. ‘개인적’ 생각을 밝힌 언론담화 형식이었지만, 우리 당국을 당황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그렇게 모욕을 당하고도 고집스레 북한을 편드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 통전부 밀어내고 주도권 잡은 외무성

권 국장의 이 같은 담화는 남북경제협력에 소극적인 문재인 정부에 대한 서운함을 담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실제 4.27 판문점회담과 9.19 평양정상회담의 공동선언에는 남북교류협력을 확대한다는 내용이 담겼지만 제대로 진행된 것은 많지 않다. 대북제재로 인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관계자에 따르면, 방북협의 당시 통일부가 ‘단순 시설점검’으로 목적을 축소하자 ‘재개 목적이 아니라면 왜 시설을 점검하느냐’며 북측이 반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 권력구조를 파악하고 있는 전문가들은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대미협상을 담당하는 창구가 ‘통일전선부’에서 ‘외무성’으로 교체됐으니 협상방식을 바꾸겠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노이 협상 결렬의 책임을 물어 김영철 부위원장과 통전부 라인이 대미협상 전선에서 밀려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남교류에나 집중하라’는 외무성 메시지의 수신자는 남측뿐만 아니라 통전부도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하노이 회담의 불발로 북한 내부에 비판여론이 있지만 통일전선부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기는 어렵다”며 “비판여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우회적으로 우리 측을 비판하고, 결렬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새롭게 대미협상의 주도권을 쥔 외무성은 미국과의 직접 협상에 방점을 찍고 있다. 대남·대미 협상을 동시에 주도했던 통전부가 물러나면서 남북미 협상 구도는 사실상 어려워졌고, 우리의 중재력이 약화된 점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다고 대남 적화통일을 전제로 한 과거 통미봉남(남한을 건너뛰고 미국과 직접협상) 전략으로 북한이 후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정은 위원장이 대미협상에 중국의 개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tbs라디오에서 “중국은 ‘유관국들과’라고 복수로 쓰고 미국·한국과 긴밀하게 협력을 하겠다는 얘기를 하는데, 김정은은 ‘유관국과’라고 단수를 쓰고 있다”며 “시진핑이 끼어들려고 하는데 북한이 ‘직접 미국 하고 거래를 해보고, 안 되면 그다음에 당신의 힘을 빌리겠다’는 내용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숙소의 방까지 안내를 하는 등 형식이 화려하다는 것은 (김 위원장이) 줄 것이 없다는 얘기”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3차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3차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뉴시스

◇ 트럼프 재선 고리로 신뢰형성 모색

종합하면 북한 외무성의 비핵화 전략은 주변국을 배제한 미국과의 일대 일 협상이다. 형식상으로는 양측 주요 참모들의 개입까지 최소화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담판’에 가깝다. 그간 외무성은 폼페이오 장관, 볼턴 보좌관 등 이른바 ‘강경파’들을 비판하며 교체 혹은 배제를 공개적으로 요구해왔다. 북한과 달리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한 미국을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방식임은 분명하다.

비핵화만 담보된다면,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도 이는 나쁘지 않은 그림이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 성과를 오롯이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CBS라디오에 출연한 박지원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 민주당 일부 후보보다 여론조사에서 지고 있다”며 “미국 본토 사람들이 제일 염려하는 것이 핵실험과 ICBM 발사다. 가장 염려하는 것에 대해 안심을 주는 이벤트를 해서 민주당 후보들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계산을 할 것”이라고 했다.

양무진 교수는 “미국이 그간 비핵화와 관련해 신고·사찰·검증을 요구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북한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북미 간 신뢰를 쌓는 동안에는 단계적·동시적 이행을 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신고사찰 등 모든 부분에 속도를 내겠다는 전략적 관점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고 판단했다.

분수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DMZ 방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초 기대됐던 남북미 정상 간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비무장지대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낸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작지 않다. 한국을 방문 중인 비건 대북특별대표는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공약을 동시적·병행적으로 진전시키기 위해 북측과 건설적인 논의를 할 준비가 돼 있다”며 협상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동시적·병행적’ 이행은 북한이 요구했던 단계적 비핵화 방식이다.

양 교수는 이와 관련해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이후 비무장지대가 평화지대로 변하고 있다”며 “비무장 지대에서 한미 정상이 한반도의 전쟁종식을 선언하는 일종의 ‘평화선언’이 이뤄진다면 김 위원장이 북미대화에 복귀하는 명분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DMZ 방문과 평화선언이 중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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