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만남 속에 깃든 인생철학. 다양한 분야의 명사들을 만나봅니다. 금요 초대석! 시대와 통하다.”

얼마 전에 출연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오프닝 멘트다. 목소리가 예쁜 아나운서가 또박또박 읽어낸 이 멘트를 듣자니 좀 오글거렸다. “인생철학은 무슨 개똥! 글줄이나 좀 쓸까, 그저 대충대충 살아가는 백면서생을 명사라니!”, 이런 생각이 오글거림을 부채질했다. “명사라고 불러주면 좋아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처럼 오글거리는 느낌을 못 감출 사람도 많겠지.” 이런 생각도 지나갔다.

그날의 오글거림은 갈수록 심해지는 방송의 ‘과잉 호칭’, ‘호칭 인플레이션’에서 비롯됐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 ‘레전드’, ‘신화’, ‘대부’, ‘전설’, ‘디바’, ‘황제’, ‘왕’, ‘왕자’ …, 뭘 조금 잘한다 싶으면 좋다는 건 모두 갖다 붙인다. PD와 작가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투다. 너무 남발하니 경박해 보인다.

과잉 호칭에 붙이는 ‘역대급’, ‘국대급’ 따위의 꾸밈말도 모자랐나. 이름 앞에는 ‘갓(God)’, 이름 뒤에는 ‘느님(하느님)’을 붙여 ‘사랑과 존경’을 표한다. 실력 있는 사람은 가만둬도 빛이 나는데, 과잉 호칭이 그 빛을 가리기도 한다.

과잉 호칭이 범람하다 보니 막장도 생겨난다. 기타 좀 치는 기타리스트 세 사람 얼굴을 보여주면서, ‘기타의 3대 천왕’이라고 한다. 다른 방송에서는 ‘한국 기타 3대 레전드!’라고 소개한다. 이 ‘3대 천왕’, ‘3대 레전드’ 중 한 명의 부친도 기타를 잘 다루는 음악인이다. 미국의 명품 기타 제조회사에서 그의 기타 실력을 기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타를 만들어 헌정했다던가. 아버지가 세계적 기타 명인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데, 그 아들에게 ‘기타의 3대 천왕’, ‘기타의 3대 레전드’라는 호칭을 붙여주면 족보는 어떻게 되나? ‘아들 천왕’이 ‘아버지 레전드’ 앞에서는 어떻게 서 있을까?

‘전설’을 모셔다 놓고 가수들이 그 ‘전설’의 노래를 고쳐서 부르는 노래 경연 프로그램이 있다. 나이가 좀 있는 예전 가수들을 ‘전설’이라고 하더니, 그 전설들을 다 우려먹었는지 몇 주 전 무대에서 어떤 ‘전설’의 노래를 부르던 가수를 이번 주 ‘전설’이라면서 전설자리에 앉혀놓고는 그의 노래를 다른 가수들이 고쳐 부르게 한다. 몇 주 지나면 이 ‘전설’은 다시 무대로 내려와 제 또래 ‘전설’의 노래를 열심히 부른다. 신계와 인간계를 무시로 오르내리니 진짜 전설인가?

누가 봐도 전설과 신화가 과잉인 사회다. 뭐든 과잉이면 싸구려, 저렴, 허접, 경박하게 된다. 전설이 전설 대접을 받고 신화가 신화로 기억되려면 우선 희소해야 하지 않나? 정말 전설로, 신화로 대접받아야 할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는 전설 대접을 마다할 것 같다. 자신도 싸구려로 취급받을까 손을 저을 것 같다.

전설과 신화가 넘쳐나는 곳에서는 전설과 신화를 구경하는 사람들도 자신을 전설이나 신화로 착각하기 쉬울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없는 것을 있게 보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그런 영향 아닐까? 그런 삶이 오래가면? 망하는 거다. 먼저 자기가 망하고, 주변이 망하고, 사회도 그렇게 망조가 드는 것이다. 뒤늦게 자신의 참모습, 자신의 진짜 실력을 알게 돼도 이미 늦었다.

칼라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아 칼라스(Maria by Callas)’가 상영 중이다. 칼라스는 지난 세기, 세계가 인정한 ‘레전드’였다. 그의 이름을 활자화하면서 ‘레전드’나 ‘디바 중의 디바’라는 말을 쓰지 않은 매체가 없었다. 하지만 칼라스는 자신을 레전드로 생각하지 않았다. 영화 마지막에 은퇴를 앞둔 칼라스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 레전드란 무엇인가요? 나는 대중이 만든 존재입니다. 나는 인간이었다고요. 말 그대로 인간이었어요. 내가 인간이 아니라면(레전드라면) 노래를 더 잘 불렀을 겁니다. …. 대중이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도 더 잘 하려고 더 노력하게 된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중이 기대한 만큼 노력했더니 ‘레전드’로 불러주더라는 말이다.

대중이 ‘레전드’라고 부를 준비가 안 돼 있는데, 또 본인도 더 잘 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데도 ‘레전드’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이미 넘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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