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지난번 편지에서 우리 사회의 반노동조합 정서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아 유럽연합이 제재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했었네. ‘ILO 핵심협약’이라니? 우리 국민들 중에 그게 무얼 말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서 ‘ILO 핵심협약’에 관한 뉴스를 접해도 자신과는 별로 관계없는 일이라 여기고 그냥 무시해버린 사람들도 많을 걸세. 우리들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제 협약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관심이 없는 거지.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는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유엔 기구로 국제적으로 적용되는 노동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다른 유엔 기구들과는 달리 노동자, 사용자, 정부 대표가 이사회를 구성하고 있네. 노동자들만 모여 있는 조직이 아니라는 뜻이야. ILO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총 189개의 협약을 만들었네. 1919년 1차 총회에서 1일 8시간 주 48시간 노동제를 명시한 게 제1호 협약이야. 2011년 100차 총회에서 채택된 가사노동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협약이 마지막이고.

ILO는 1998년 6월 인권존중의 기본이념 실천을 위해 '노동의 기본 원칙과 권리에 관한 선언(Declaration on Fundamental Principles & Rights at Work)'을 채택하게 되네. 4개 분야 8개 협약을 모든 회원국이 존중하고 실천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고 선언하지. 그게 'ILO 핵심협약'이야.

1991년에 ILO에 가입한 우리나라는 2019년 현재 8개의 핵심협약 중 '차별금지(100호, 111호)'와 '아동노동 철폐(138호, 182호)'에 관한 4개 협약은 비준했지만, 나머지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87호, 98호), 강제노동 금지(29호, 105호) 등 4개의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네. 국내법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고, 노사 간 이해관계가 엇갈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 9월 정기국회에서 105호를 제외한 3개 협약의 비준동의안과 관련 법안을 함께 논의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지만, 아직도 경영계 등 보수 세력들의 반대가 심해서 잘 될지 모르겠구먼.

사실 협약 87호와 98호는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는 우리 헌법 33조의 규정과 별 차이가 없네. 노동자들의 노동 3권을 보장하는 기본협약이지. 국회에서 비준이 되면, 군인과 경찰을 제외한 노동자들의 포괄적인 노조 결성권이 인정되고, 학습지 교사나 택배 기사 등 지금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도 노동 3권을 보장받게 되는 거지.

신자유주의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유행했던 말이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 ’였네. 우리의 제반 제도와 사고방식을 ‘세계 표준’ 맞게 대대적으로 바꿔야 전 지구적인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국민 겁박용으로 자주 사용되었지. 그 결과 우리 사회의 많은 제도들이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바뀐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노동 분야는 그런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예외였네. 정리해고를 쉽게 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한 노동의 유연화는 받아들이면서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철저하게 보장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는 모른 척 한 거지. 지난 20년 동안 4개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는 게 그 좋은 보기야. 이래저래 한국은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노동문제에 있어서는 아직 후진국임이 틀림없네.

협약 87호와 98호를 비준한 나라가 2017년 7월 현재 각각 154개국과 165개국이네.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가난한 나라들도 진작 비준을 했어. 187개 회원국 중 80%가 넘는 나라들이 비준했으니 이런 게 진짜 ‘글로벌 스탠더드’ 아닌가? 하지만 부끄럽게도 OECD 국가 가운데 이 두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는 나라는 미국과 한국뿐이네. OECD 국가들 중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가 두 나라인 것도 우연이 아니야.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미국적인 가치와 제도만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우리는 OECD 회원국 중 가장 오랜 시간 일을 하네. 일 년이면 독일 사람들보다 3개월, 지리적으로 이웃인 일본 사람들보다는 1개월 더 일해. 65세 이후 일하는 사람들 비율도 가장 높아. 비정규직 비율도 가장 높고 산업재해가 가장 많은 나라야. 외국 사람들이 일중독자라고 비웃어도 열심히 일하고 있지. 그러면서도 우리는 노동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 사람들이 국제적인 노동기준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어.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아. 머지않아 유럽연합의 요청으로 전문가 패널이 소집되고, 한국이 FTA 노동조항을 위반한 국가로 인정될 경우, 유럽 연합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캐나다 등으로부터 받게 될 무역 제재 등을 생각하면 끔찍한데… 기우이길 바랄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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