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범찬희  1인 가구 생활 6년째에 접어든 필자에게 ‘햇반’은 청춘의 허기진 배를 채워준 고마운 존재로 각인돼 있다. 적막한 자취방에서 텅 빈 밥솥과 마주했을 때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설움을 위로해 준 벗으로서 말이다. 형편이 좀 나아진 지금에도 종종 귀차니즘이 발동하면 즉석밥의 대명사 햇반을 찾곤 한다.

가격 경쟁력에서 앞선 타업체 제품이 진열대 옆에 있음에도 꼭 햇반에 손이 간 건 다름 아닌 맛 때문이었다. 라면으로 유명한 업체에서 내놓은 즉석밥은 햇반의 품질에 못 미쳤다. 퍽퍽한 식감이 드는 게 햇반의 찰기와 윤기를 따라오지 못했다.

3개를 사면 하나를 더 준다는 ‘회유’에도 경쟁사 제품은 수북이 쌓여있는 반면, 햇반의 진열대는 늘 여유가 넘쳤다. 항간에 떠도는 ‘사람들 입맛은 비슷하다’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기자를 포함, 많은 현대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햇반이 요즘 들어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이다. 다름 아닌 최근 실시 중인 ‘밥솥교환 이벤트’가 여러 뒷말을 낳고 있다. CJ제일제당이 쓰던 밥솥을 가져오면 선착순으로 햇반 1년치를 제공하는 마케팅에 나서자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가장 발끈하는 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슬로푸드 쪽이다. CJ제일제당의 프로모션이 집밥의 가치를 격하하고 인스턴트 식생활을 조장한다며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2일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성명서를 통해 “CJ제일제당의 캠페인은 조리를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하게 여기게 조장하면서 조리를 기피하게 만들고 있다”며 “파렴치하고 음험한 마케팅은 조리의 중심인 밥솥을 아예 없애서 식생활을 가공식품, 편의식품, 패스트식품에 완전히 의존케 하려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CJ제일제당의 바람(?)대로 이 땅에 밥솥이 사라질 일은 없겠지만, 협회 주장에 상당 부분 수긍이 간다. 햇반의 이번 이벤트는 간편식의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집밥의 보완재 역할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주식이 되겠다는 ‘이빨’을 드러낸 꼴이다. 과연 인스턴트 범주에 속해있는 즉석밥이 정성들여 만든 밥솥밥과 동일선상에 설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밥솥 업계를 저격했다는 점에서도 상도덕에 어긋난다. 기업의 마케팅 활동이 경쟁 업체를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방향으로 전개 돼서는 곤란하다. 더군다나 밥솥은 즉석밥과 한다리 건너 있는 ‘다른 동네’다. 그렇지 않아도 내수 시장 포화 등으로 정체에 빠져있는 쿠쿠, 쿠첸 등 밥솥업계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이들 업체들은 대놓고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CJ제일제당의 기획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다.

더 우려스러운 건 이번 이벤트가 최근 불거진 일본산 미강 이슈와 연계해 기획된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최근 햇반은 일본산 미강(쌀을 찧을 때 나오는 가장 고운 속겨)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곤욕을 치렀다. 나아가 미강이 후쿠시마산이라는 의혹이 불거져 제품 안전성이 도마에 올랐다. 자칫 국민 즉석밥이라는 아성이 흔들릴 수 있는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집밥의 가치’ 볼모로 삼은 건 아닌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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