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꼬였던 남북관계가 풀릴 즈음되면 북한이 들고 나오는 카드가 있다. 분단의 아픔을 가장 절절히 느끼며 살아온 실향민들의 염원인 이산가족 상봉 문제다.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같은 도발적 행동에 때문에 북한에 대해 싸늘했던 여론도 이산상봉이란 요술방망이 앞에서는 누그러질 수밖에 없다. 북한에 대한 시각차를 드러내곤 하는 보수·진보층의 갈림 현상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인도주의적 사안은 정치·군사적 대립이나 이념 갈등을 넘어서는 이슈라는 얘기다.

북한이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전향적 자세를 취하거나 생사확인, 상봉 같은 현안에 호응해 나올 때 우리 정부는 그에 화답하는 조치를 취하는 게 관례로 자리 잡았다. 북한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식량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북지원 사업이다. 북한을 지원하는 문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 내부의 논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산상봉과 대북 식량지원이란 인도주의 사안을 맞바꿈 하는 데에는 여론의 저항이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북한에 대한 일방적 지원형태를 띠는 식량 제공이지만 우리 정부가 합의문 등에서 ‘인도주의 협력’이라고 지칭하는 건 이 같은 상호주의적 성격을 고려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북 간 인도주의 협력사업에 빨간불이 켜졌다. 지난해 4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화해·협력의 기류가 한반도를 감싸면서 많은 실향민과 국민들은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될 것이란 기대를 가졌다. 8.15를 계기로 금강산에서 남북한 측에서 각각 100명이 상대측 가족을 만나는 상봉 행사가 성사되면서 이런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하지만 올 설명절과 8.15 광복절, 추석을 거치면서 이산상봉이 불발되자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들은 속을 태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에 이산상봉 신청서를 낸 실향민은 1988년 이후 13만3,305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 가운데 59%인 7만8,671명이 이산의 한을 풀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생존자 5만4,634명이 일 년에 한 차례 꼴로 찔끔찔끔 이뤄지는 상봉행사(회당 100명 선발)를 한다면 543년이 필요할 것이란 계산이다. 이런 식으로 상봉하다간 모두가 만나려면 500년 넘게 걸릴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직후 열린 8.15 상봉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모두 21차례 상봉에 그쳐 1년에 한 차례 상봉하는 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건 90세 이상 1만2,998명을 포함해 80세 이상 고령 이산가족이 64%를 넘는다는 점이다.
 
북한의 식량사정을 고려해 우리 정부가 제공하겠다고 밝힌 쌀 5만톤을 북한이 거부한 것도 안타까운 대목이다. 당분간 북미관계에 집중하면서 남북문제에는 거리를 두려는 차원이라 해도 기아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외면하고 인도주의적 사업에 미온적인 북한 당국의 태도는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여기에다 북한은 2016년 4월 중국 저장성 닝보에 있는 북한 류경식당에서 일하던 종업원 12명의 집단탈북 사건을 내세워 “이들을 송환하기 전에는 이산상봉은 꿈도 꾸지 말라”며 압박하고 있다.

남북 간 보건·의료 분야 협력도 빨간불이 켜진 상황이다. 북한을 휩쓴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은 9월 중순 한국에도 발병했다. 북한의 경우 “평안북도의 돼지가 전멸했다”는 국가정보원의 국회 정보위 정보가 나올 정도로 심각하다고 한다. 북한 당국이 속수무책이라 확산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중국 단둥과 맞닿은 신의주를 포함한 평안북도의 돼지농장이 쑥대밭이 됐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북한에) 고기가 있는 집이 없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라고 덧붙였다.

안타까운 건 돼지열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우리 측의 남북협력 제안에 북한이 미온적이거나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5월 초 북한에서 최초 발병 사실이 알려진 직후 우리 정부는 북한에 방역 협력을 제안했고, 남한 지역 내 발병이 확인된 9월 18일에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연락대표 접촉을 통해 재차 협력하지는 통지문을 전달했다. 하지만 북한은 호응하지 않았다. 북한이 돼지열병의 심각성보다 남북관계에 대한 뻣뻣한 입장을 고수하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국제기구에 발병사실을 보고한 이후 넉 달 넘도록 추가발병이나 확산, 방역실태 등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않고 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김정은 정권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다. 열악한 북한의 의료보건 상황을 돕기 위한 대북 의료지원은 오랜 기간 단순 약품 지원에서 의료장비의 제공, 병의원 건립까지 이어지면서 활동 폭을 넓혀왔다. 1994년 김일성 사망과 이듬해 대홍수로 망가진 북한의 의료체계를 긴급 가동토록 함으로써 피해상황의 악화를 방지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특히 2004년 4월 평북 용천군에서 발생한 열차 폭발사고 구호과정에서 대한적십자사나 우리 민간단체의 대북 의약품지원은 큰 도움이 됐다.

이후 사스와 조류인플루엔자(AI),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나 질병이 창궐할 때마다 국제 구호단체와 우리 당국·민간이 약품이나 장비를 지원했다. 우리 국민들의 정성이 담긴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남위협과 도발노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일부 실망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인도주의 협력은 이어졌다.

이산상봉이나 대북지원, 남북 간 보건·의료 협력은 단순한 인도주의 사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를 통해 남북한이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고 경제협력이나 정치·군사 합의, 다양한 분야의 교류사업으로 확대해나가는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다. 북한의 잇단 대남 불만 표출로 숨고르기 과정에 빠진 남북관계가 다시 기지개를 켜야 할 시점에 이산가족 문제와 대북지원은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정부의 대북설득 전략과 함께 북한의 전향적 호응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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