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주영형’. 1980년 11월 13일에 유괴돼 바로 다음날 살해된 ‘이〇〇군’ 유괴사건의 범인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 이춘재 때문에 38년 만에 이 이름이 떠올랐다. 〇〇이는 그때 중학교 2학년이었으며, 주영형은 〇〇이가 다니던 학교 체육선생이었다. 주는 노름빚 1,000만원을 갚으려고 〇〇이의 누나를 유괴하려다 실패하자 〇〇이를 유괴, 감금한 후 〇〇이 집에 전화를 걸어 4,000만원과 〇〇이의 생명을 바꾸자고 협박했다.

그는 유괴 다음날 “우리 누나를 유괴하려던 것도 선생님이에요?”라고 소리치는 〇〇이의 손발을 묶고 입을 틀어막은 채 이불을 덮어씌워 숨지게 하고, 사체는 북한강변 모래밭에 암매장했다. 〇〇이는 주가 자기 집에 전화를 걸어 협박하는 걸 듣고는 소리쳤다가 불쌍하게 세상을 떠났다.

가족과 경찰, 그리고 언론은 〇〇이가 벌써 숨졌는데도 범인에게 속고 있었다. 제일 불쌍한 건 부모와 가족이었다. 그들은 범인이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〇〇이의 안전을 고려, 비공개였던 수사가 공개수사로 전환되고, 막 출범한 5공 군사정권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정치·경제 문제를 비판할 수 없었던 언론이 그 억압의 분출구로 매일매일 “유괴범 하나 못 잡는 무능한 정권”을 비판하고, 이로 인해 여론의 분노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자, 당시 대통령(전두환)이 “〇〇이를 살려 보내면 너도 살고, 죽여 보내면 너도 죽는다”라고 범인을 ‘협박’까지 하고 나선 이 사건은 1981년 11월 30일 주가 범행을 자백하면서 약 1년 만에 끝이 났다.

하지만 주는 이보다 훨씬 일찍 체포될 수 있었다. 주는 사건 발생 직후 용의자의 한 명으로 조사를 받았다. 납치되던 날 〇〇이가 집을 나서면서 어머니에게 체육선생님을 만나러 간다고 말했던 게 제일 큰 용의점이었다.

경찰은 주를 불러 당일 행적을 조사했으나 “그 시간에 대학원에서 강의를 들었다”는 주의 말을 믿고 풀어주었다. 대한민국 최고 명문 대학 사범대 체육학과를 졸업한 주가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그 대학원에 등록한 것은 사실이었다.

알리바이가 인정된 주를 수사선상에서 제외한 경찰은 〇〇이가 사라진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〇〇의 어머니에게서 주와 관련된 새로운 진술을 듣는다. 〇〇이가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나를 만난다고 말하지 말고 나오너라”라고 했다는 진술이다.

경찰은 사건 당일 주의 행적을 다시 캐기 시작했다. 결정적 단서는 그 대학원에서 나왔다. 경찰은 대학원을 찾아가 출석부 등을 확인해 주가 당일 대학원에 나오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주의 알리바이가 무너진 것이다. 경찰은 주를 심문, 납치와 살해를 자백 받았다. (수사 결과 주의 제자로, 주와 성관계를 가졌던 여고생 2명이 범행을 도왔으며, 주는 이들 외에도 20여 명의 여학생을 성폭행한 사실도 밝혀졌다.) 1년 여 나라를 뒤흔들었던 이 사건은 경찰이 주의 알리바이를 대학원에 가서 직접 확인했더라면 쉽게 끝났을 것이었다.

이춘재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임도 진작 밝혀졌을 수 있었다.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이는 1994년 1월 붙잡혀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당시 이를 검거했던 청주서부경찰서는 화성에 있던 이의 집을 압수수색했는데, 화성사건 수사본부는 이가 화성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수사본부로 데려와 달라”고 했으나 청주서부경찰서는 “청주 사건 수사가 급하다. 직접 청주에 와서 조사해라”라고 답했고, 화성사건 수사본부는 그걸로 이에 대한 직접 조사는 포기해버렸다. 화성사건 수사본부가 그 때 이춘재 조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화성사건은 그렇게 오래도록 미제로 남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영형이 〇〇이 사건 범행을 자백한 그날 밤, 만 2년 차 경찰기자로서 선배 기자들을 따라다니며 이 사건을 취재하던 나는 주가 범행을 자백한 11월 마지막 날 밤, 어두운 북한강 모래밭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지켜보았다. 모래구덩이에 속에서 경찰관이 들어 올린 〇〇이의 자그마한 머리통. 부패가 진행 중이어서 완전한 백골이 되지는 못하고 갈색에 가깝게 변한 그 머리통-해골-은 애처롭기만 했다. 〇〇이의 그 머리통은 그날 이후 누구의 죽음이든 억울하고 불쌍한 죽음을 생각할 때면 내 눈앞에 꼭 떠오르고 있다. 이게 나의 ‘살인의 추억’이다. 〇〇이 사건 수사본부가 처음에 더 확실하게 수사를 했더라면, 화성사건수사본부와 청주서부경찰서가 철저하게 힘을 합해 수사를 했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추억이다.

(‘주영형’, 이 세 글자를 뉴스 검색창에 입력하면 제목에 〇〇이의 본명이 들어간 예전 기사가 수십 개 주루룩 뜬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에 그 본명을 쓰지 못하는 건, 그날 밤 북한강에서 보았던 그 자그마한 머리통 때문이다. 그 죽음이 불쌍해서 〇〇이의 이름을 쓰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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