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정숭호</strong>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어제(15일) 아침나절엔 볕이 참 좋았습니다. 창밖 산수유 꽃 샛노랗고 양지쪽 목련 움은 통통했습니다. 먼지 없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는데, 머릿속엔 진한 회색 구름이 들어차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구름에 비 들어 있는지 모른다”라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한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 알 수 없으니 이 속담이 연상됐고, 맑은 하늘을 보고 있는데도 마음엔 구름이 끼는 거지요. 이렇게 모든 것을 우한 폐렴이 덮어버리는 게 요즘의 하루하루입니다.  

집에만 갇혀 계시나요? 영화 ‘보카치오 70’ 안 보셨으면 ‘강추-강력 추천’합니다. 비토리오 데시카, 루키노 비스콘티, 페데리코 펠리니, 마리오 모니첼리 등 20세기 중반의 유명한 이탈리아 영화감독 4명이 따로따로 찍은 짧은 영화 4편을 한데 묶은 ‘옴니버스(omnibus)’ 영화입니다. 1962년에 개봉했습니다. 

그 시대의 거물/거장 감독들인 만큼 주연 여배우들도 ‘짱짱’합니다. 모든 것이 크고 두툼한 소피아로렌, ‘요염한’이라는 말이 달리 어울릴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아니타 애크버그(스웨덴 사람이라 ‘아니타 액베리’라고 읽어야 한다지만 어릴 때부터 들어온 애크버그가 귀에 익어서 …), 너무 예쁘고 귀여워 세기의 미남배우 알랭 들롱 형님도 정신을 잃고 아내로 맞았던 로미 슈나이더, 이름도 얼굴도 이 영화에서 처음 보지만 깜찍함이 넘치는 마리사 솔리나스, 네 사람 모두 ‘20세기적 아름다움(요즘엔 보기 드물다는 뜻에서)’이 넘칩니다. 감독과 배우들이 대단하니 영화도 볼 만합니다. 많이 웃게 되지만 애잔함도 그만큼 짙습니다. 다시 한 번, 안 보신 분들에게 무조건 ‘강추’합니다.

우한 폐렴 때문에 도서관이 문을 닫아 ‘데카메론’을 빌릴 수 없게 돼서 이 영화를 다운받아  봤습니다. 페스트가 창궐해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던 14세기 중반에 나온 소설이지요. 당시 이탈리아에 살았던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가 썼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페스트로 픽픽 쓰러지고 있지만, 어느 구름에 비가 들어 있는지 몰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사 3명과 숙녀 7명이 산속에 들어가 열흘 동안 한 사람이 하루에 하나씩 털어놓은 100가지 재미난 이야기를 모아놓은 형식입니다. 

중세 시대에 수도원과 귀족의 집과 별장에서 수도승과 수녀, 귀족과 하녀, 신사와 숙녀가 서로서로 이러쿵저러쿵 얽히고설키면서 드러나는 위선과 가식,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심을 깊이 다뤘다고 해서 읽어보려 했는데 도서관이 닫혔으니 책을 빌릴 수 없고, 그러다가 작가의 이름이 들어간 옛 이탈리아 영화를 보는 걸로 대신했습니다. 

역병을 마주한 인간 군상들의 이모저모를 밝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도 이 시점에서 읽을 만하다고 합디다만, 왠지 진지하기만 할 것 같은 카뮈의 이 소설보다는 웃음코드-웃음을 유발하는 요소와 관음증적 요소가 많다고 해서 데카메론에 마음이 더 끌렸습니다. 이 책이 일찍부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가 웃음 코드와 성적 코드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으니 이것저것 골치 아픈 요즘엔 당연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개 되는 ‘단톡방’에도 ‘오늘의 유머’ 같은 게 부쩍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오래전에 나온 거, 이미 다른 단톡방에서 본 거, 싱겁기 짝이 없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집에 들어박혀 먹기만 했더니 (살이) 확찐자가 됐다”는 거, 그런 것 말입니다. 청소년 출입금지인 ‘19금’에 해당될 사진과 살짝 질펀한 이야기도 종종 올라옵니다. 뒤늦게 이런 걸 올리는 분들도 이 역병의 시대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있는 분들일 겁니다. 페스트를 피해 산속에 들어간 ‘데카메론’의 신사, 숙녀들처럼 이분들도 ‘무균(無菌) 공간’인 단톡방에서 자기들 나름의 데카메론을 쓰고 있는 겁니다.
   
볕 좋은 날, 구름 없는 하늘을 보다가 구름이 떠오르더니 별 없는 대낮인데, 별에 관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마흔이 안 돼 세상을 떠난 화가 반 고흐가 편지에 남긴 글입니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왜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 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은 천상의 운송 수단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역>

반 고흐는 별까지 걸어가지 못했습니다. 콜레라 같은 역병이나 결핵에는 걸려서가 아니라 젊은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더러운 역병을 어서 물리치고 모두 별까지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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