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누군가는 몰래 촬영하고, 누군가는 소비한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온라인 공간으로 퍼지는 젠더 폭력. 우리는 이것을 ‘디지털 성범죄’라고 부른다. 우리 사회의 디지털 성범죄는 생각보다 자주, 많이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두려움. 무엇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디지털 성범죄가 사라지지 않는 현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편집자주]

텔레그램에 '박사방'을 열고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착취 범죄를 저지른 '박사' 조주빈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박사방’을 운영한 운영자 조주빈(24)이 25일 검찰로 송치됐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지난 17일 다수 여성들의 성 착취 동영상 제작·유포한 조씨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아르바이트 등을 미끼로 유인한 약 70여명의 여성들을 상대로 나체사진과 신상정보를 받아낸 조씨는 해당 여성들에게 성 착취 영상을 찍도록 협박한 것으로 조사됐다. 피해자들 중 미성년자도 다수 포함돼 있어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범죄행각에 표출돼야할 분노의 화살이 이상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 이번 텔레그램 성 착취방 사건으로 온라인 상에서 성별 갈등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에겐 2차 가해가, 사회적으론 큰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여성 누리꾼들이 남성들 전체를 n번방의 잠재적 가해자라고 주장하자 남성 누리꾼들은 이에 대해 "내가 n번방 가해자면 너는 성매매 여성이다"라고 대립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여성 누리꾼들이 남성들 전체를 n번방의 잠재적 가해자라고 주장하자 남성 누리꾼들은 이에 대해 "내가 n번방 가해자면 너는 성매매 여성이다"라고 대립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 ‘모든 남자가 범죄자’ vs ‘속은 피해자가 잘못’… 온라인상 남녀갈등 심화

이번 박사방 운영자 조씨의 검거로 성별 간 갈등은 텔레그램 성 착취방의 원조격인 ‘n번방’ 참가자 수가 매우 많을 것이라는 추산 결과에서 시작됐다. n번방은 박사방의 전신으로 텔레그램 성범죄방의 원조격이다. 현재 n번방의 초대 운영자인 ‘갓갓’은 잠적했으며 경찰이 추적에 나선 상태다. 

현재까지 n번방 참가자 규모에 대한 경찰 측 추산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경찰청 관계자는 “박사방 회원으로 알려진 1만명은 유료회원이 아닌 맛보기방 회원으로 추정된다”며 “1만명 중 유료회원도 있겠으나 현재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다만 여성단체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는 n번방 등 성 착취 대화방의 참가자 수가 약 26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를 통해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공개를 요청한 상태다. 26일 오후 1시 현재 해당 청원은 191만명을 넘어섰다. 

텔레그램 성 착취방 참가자 수가 수십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이 나오면서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남성 혐오’ 정서가 증가하는 추세다. 여성 누리꾼들이 주로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는 ‘n번방을 보면 한남(한국 남성들을 비하하는 용어)들은 잠재적 성범죄자가 아니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한남은 그냥 범죄자’ ‘잠재적도 아니고 그냥 성범죄자일 뿐’이라는 등의 남성 혐오글들이 올라왔다.

자신을 여성이라고 밝힌 한 누리꾼은 “한국 남자 100명 중 1명이 n번방에 들어간 적이 있는 셈”이라며 “주위 사람 중에 성 착취 영상물을 공유하거나 봤을 수도 있는데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라고 밝혔다. 또다른 누리꾼 역시 “그동안 많은 성범죄를 저지른 한남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지목받는건 당연하다”며 “억울해하지 말라”는 글을 올렸다.

n번방 등 성 착취 대화방의 참가자 수가 약 26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추산 결과가 나오면서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지에서 한국 남성들이 '잠재적 성범죄자'라는 남성혐오표현이 늘어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이에 남성 누리꾼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잘못한 것은 n번방 운영자나 박사같은 범죄자들인데 일반 한국 남성들까지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교 커뮤니티의 한 누리꾼은 “성 착취는 박사(조주빈)가 했는데 나는 한남이라 원죄가 있어 같이 욕을 먹고 있다”며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은 ‘한남충’ 어쩌고 하는 글 뿐이라 이제 피곤하다”고 밝혔다. 

남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여성 혐오를 표현한 글들이 다수 올라오고 있다. 한 누리꾼은 게시물을 통해 “여자친구가 나보고 n번방을 들어가본 적이 있냐고 물어 너무 화가나 ‘넌 그러면 유학 갔을 때 원정 성매매 뛴 적 있냐’고 물었다”며 “이 말을 들은 여자친구가 울어버린 후 연락두절이 됐다”고 밝혔다. 이 게시물에는 “(여자친구와) 잘 헤어졌다”며 “저런 건 그냥 참지 말고 지르는 게 답”이라는 등의 댓글들이 올라왔다.

아울러 n번방 피해자들에 대한 비난 글도 쇄도하고 있어 2차 피해 우려도 심각한 상황이다. 실제로 다수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방문하면 “머리 나쁜 ‘한녀(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말)’가 쉽게 돈을 벌기 위해 n번방에 들어갔으면서 왜 징징대냐”며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모습이 우습다”는 등 피해자들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는 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남성향 온라인 커뮤니티를 방문하면 n번방 피해자에게 '돈을 쉽게 벌려고 한 것 아니냐'고 조롱하는 게시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n번방 사건으로 인해 성별 간 갈등이 심화되는 것에 대해 자중해야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처벌받아야할 것은 박사, 갓갓과 같은 범죄자인데 남녀 대립으로 인해 피해자들의 상처는 깊어지고 사회적으론 큰 혼란만 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으로 잘 알려진 서지현 검사도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범죄자 아닌 남성분들을 대신해 화를 내 드립니다”라는 글을 통해 “성범죄 문제는 결코 ‘남녀 간의 전쟁’이 아니라 ‘범죄와의 전쟁’이다”라고 밝혔다.

서 검사는 n번방 참가자들을 옹호하는 의견에 대해서도 “남자라면 야동 누구나 본다는 말로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만들지 말라”며 “‘남자라면 야동 좀 볼 수 있지’라고 남성혐오 좀 부추기지 말라”고 비판했다. 이어 “이번 사건은 ‘야동’이 아닌 성 착취물이 맞다”며 “성범죄와의 전쟁에 함께 분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성 착취 동영상을 유포했던 '박사방'과 'n번방'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엉뚱하게도 남녀간 '젠더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행위가 자칫 이번 사건의 본질인  '여성에 대한 성범죄의 단죄'를 흐릴 수 있다는 것이다./ 픽사베이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성 착취 동영상을 유포했던 '박사방'과 'n번방'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엉뚱하게도 남녀간 '젠더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행위가 자칫 이번 사건의 본질인 '여성·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의 단죄'를 흐릴 수 있다는 것이다./ 픽사베이

◇ 제2의 n번방 막기 위해선 사건의 ‘본질’에 집중해야

사정이 이쯤되면서 전문가들 사이에선 우려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자칫 젠더갈등에서 비롯된 분노와 혐오 로 인해 근본적인 문제가 감춰질 수 있어서다. 본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선 남녀 성대결이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에 집중하고, 이런 사건이 반복되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성범죄에 대한 가벼운 인식과,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는 방관의 시선 등으로 인해 오랜 세월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염증이 곪아 터져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관계자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이번 박사방이나 n번방과 같은 텔레그램 유료방 등 접근이 힘든 곳을 제외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 가능한 곳이 80여개에 달했다”며 “이는 남성들이 여성을 향해서 집단적으로 온라인상에서 가해온 성폭력, 성착취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같은 행태는 그동안 성폭력, 성 착취에 대해 가볍게 생각해온 사회적·문화적 요인에 의해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며 “제2, 제3의 n번방을 방지하기 위해선 일반 남성들도 ‘난 아니니까’라는 방관자의 위치를 넘어서 사회 전체의 인식 개선을 위해 다 같이 목소리를 내주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도 n번방과 같은 범죄들이 지속되는 원인 중 하나다. 실제로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한 성범죄자의 최종심 유기징역 평균 형량은 고작 징역 2년에 그쳤으며   현행법 상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임을 소지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 고작이다./ 픽사베이

아울러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도 n번방과 같은 범죄들이 지속되는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국내 디지털 성범죄 관련 처벌은 매우 ‘관대한’ 편이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7년도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발생추세와 동향분석 결과’에 따르면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한 성범죄자의 최종심 유기징역 평균 형량은 고작 징역 2년에 그쳤다. 

강창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법무부에서 제출받은 제료에 따르면 지난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총 2,146명이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소지로 검찰 수사를 받았으나 이 가운데 44.8%가 불기소 처분으로 재판조차 받지 않았고 40%는 소재불명 등으로 수사가 중지됐다. 아동 성 착취 범죄자의 85%가 지난 5년 동안 처벌을 받지 않은 셈이다.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소지자에 처벌에 관헌 법안에도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 현행법 상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임을 소지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고있다. 단순 시청자는 처벌 대상이 아니다.

진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3일 국회서 개최된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긴급 간담회에서 성 착취 범죄를 끊어내는 강력한 방법은 처벌 뿐이라며 동조한 사람 모두 단죄돼야 한다고 밝혔다.

진 의원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성범죄는 더욱 더 잔인해지는데 법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범죄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기존 형법을 적용하다보니 낮은 형량이 적용돼 관대한 처벌로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여러 법들을 모아 디지털 성범죄 특별법을 준비해 경찰과 검찰, 법원 모두 성범죄 근절에 총력을 다해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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