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범찬희 기자  일본이 한국에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의 수출절차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한 지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새삼 세월의 빠름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지난 1년의 시간을 돌아보면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휘청거리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지는 못한 거 같다. 재계 빅3 수장들과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한 자리에 모이며 ‘한일 재계 어벤져스’가 결성될 만큼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간 것치고는 잠잠한 분위기다.

기자가 유통 담당이다 보니 이쪽 사정에 밝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수개월 뒤 터진 코로나19 방역에 국가 역량이 집중되면서 일본의 수출규제가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기 때문일까.

일본 수출규제로 인한 반도체 위기론이 확산되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초기 우려와 달리 별다른 영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삼성이 소재 수급 불안정으로 인해 반도체 생산 일정에 차질을 겪고, LG가 OLED TV 납기일을 맞추는 데 애를 먹는 상황이 발생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던 거다.

한국 경제가 일본의 수출규제 직격탄을 비껴갈 수 있었던 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꼽힌다. 우선 발 빠르게 대체국을 마련한 덕분이다. 정부와 기업들이 의기투합해 일본 의존도를 낮추고 기존의 다른 거래국가 수입 비중을 늘려 안정화를 꾀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반도체 핵심소재인 ‘불화수소’는 대만이 일본을 제치고 중국 다음으로 우리의 중요한 거래국이 됐다. 또 ‘포토레지스트’(감광제)는 벨기에가 2대 수입국으로 떠올랐다.

충격파를 최소화하기 위한 국내의 다각적인 노력 외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 자체가 양국의 관계를 파탄 낼 정도로 강도 높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거다. 불화수소의 대(對) 일본 수입 비중이 42%에서 10% 정도로 급감하긴 했지만, 포토레지스트는 여전히 87%에 가까운 높은 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또 다른 핵심 소재인 ‘플루오린폴리이미드’는 오히려 수출규제 이후 일본 비중이 소폭 상승해 93%에 다다랐다.

당장이라도 국가 경제가 고꾸라질 것처럼 법석을 떨던 언론의 호들갑이 기우에 그친 건 천만다행인 일이다. 코로나19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우리 경제가 또 다른 고통을 견딜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더라도 방심을 해서는 안 되겠다. G20을 넘어 선진국 반열에 오르고 있는 대한민국의 퀀텀점프를 위해서는 정재계가 합심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리스크’를 털어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 폭풍우가 비껴가는 행운이 또 찾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국가의 명운을 ‘운’에 맡길 수 없는 노릇이다. 국가 주력 산업의 명줄을 쥔 일본에 정치외교 문제에 관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낸다는 건 넌센스에 가깝다.

자존심이란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지녔을 때야 비로소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법이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