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69세’(감독 임순애)가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엣나인필름
영화 ‘69세’(감독 임선애)가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엣나인필름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인생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

69세 효정(예수정 분)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9세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긴 고민 끝에 효정은 동거 중인 동인(주기봉 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신고한다. 하지만 경찰과 주변 사람 모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효정을 치매 환자로 매도하고, 법원 역시 나이 차이를 근거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효정은 피해자가 더 고통 받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용기를 내 가해자를 향한 일갈을 준비한다.

영화 ‘69세’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69세 효정이 부당함을 참지 않고 햇빛으로 걸어 나가 참으로 살아가는 결심의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영화 ‘사바하’ ‘남한산성’ ‘화차’ 등 수십 편의 장편 영화에 참여한 스토리보드 작가 출신 임선애 감독의 첫 연출작이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부문 KNN 관객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69세’는 그동안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노인 성폭행 범죄를 소재로 하는데, 사건을 자극적이거나 노골적으로 전시하지 않는다. 절제돼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그려내 진정성 있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69세’에서 효정으로 분한 예수정 스틸컷. /엣나인필름
‘69세’에서 효정으로 분한 예수정 스틸컷. /엣나인필름

영화는 성폭행을 당한 69세 효정을 통해 여성으로서 노인으로서 사회에서 약자가 감내해야 할 시선과 편견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옷을 잘 차려 입고 늘 정갈한 자세를 유지하는 효정을 향해 ‘노인답지 않다’거나 ‘처녀같이 늘씬하다’ 등의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이들은 특별한 악인이 아닌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단순한 건망증도 ‘노인’이기에 치매로 치부되고, ‘노인’이기에 ‘남사친’과의 동거는 웃음거리가 된다. ‘노인’이기에 ‘덜’ 아플 거라고 너무 쉽게 판단해 버리는 영화 속 현실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과연 나라면 69세 효정을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었을까.

‘69세’에서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준 기주봉(왼쪽)과 예수정. /엣나인필름
‘69세’에서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준 기주봉(왼쪽)과 예수정. /엣나인필름

효정은 이러한 시선에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선다. 자신을 멋대로 재단하는 이들을 향해 ‘늙은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며 힘겹게 목소리를 내는 것을 시작으로, 피해자가 더 고통받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용기를 낸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가해자와 싸우며 세상으로 나아간다.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효정으로 분한 예수정은 깊은 연기 내공으로 극에 진정성을 더한다.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는 연기로 큰 울림을 전한다. 영화의 마지막 그가 보여준 미소가 잊히지 않는다. 동인을 연기한 기주봉도 좋다. 효정이 직접 일을 겪은 당사자라면, 동인은 함께 고민하고 도와주는 사람이자 간접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인물이다. 기주봉은 현실적이고 진실된 연기로 공감을 이끈다.

임선애 감독은 “그동안 외면해왔던 노인 여성의 성폭력 피해 사건을 통해 여성과 노인을 따로 떨어뜨려 보려는 이중 잣대와 우리 사회가 노년 세대에 가져왔던 따갑고, 냉담한 시선들을 담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자 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러닝타임 100분, 오는 2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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