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 칼럼니스트
하도겸 칼럼니스트

공자께서 논어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적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인생을 길게 산다.”(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 자왈: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라고 말씀하셨다.

직역을 하면 위와 같지만, 의미를 살려 현대문으로 고치면 “지혜로운 사람은 흐르는 물처럼 살고 어진 사람은 청산처럼 한 곳을 지키며 오래 살기를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부지런하게 살며 인생을 즐기고, 어진 사람은 고요한 삶을 살며 인생을 길게 산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물이라고 하면 산에 대칭되는 말로 ‘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상선약수(上善若水)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구체적으로는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의 성질을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로 삼는 도가의 말씀에 나오는 ‘흐르는 물’을 가리킨다. 불교에서도 흐르는 물처럼 사는 것으로 늘 아래로 흐르고 멈추고 고이면 썩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처럼 늘 흐르면서 바다로 향해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집착 등 머무는 바 없이 사는 그런 수행자와 같은 자연의 삶을 말하기도 한다. 나아가 깨달음을 얻어서 지혜를 습득한 사람은 그냥 지혜로워진 것이 아니라 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난정 청허 김순환 서예가가 즐거울 '락'를 쓰는 모습이다. / 하도겸 제공
사진은 난정 청허 김순환 서예가가 즐거울 '락'를 쓰는 모습이다. / 하도겸 제공

즉 안다는 것은 곧 알게 된 것을 이해해서 늘 실천한다는 뜻이지 단지 머리로만 안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지행을 해서 지혜를 얻은 자는 늘 기꺼이 부지런하게 살며 오래된 미래로 나아간다. 하지만 늘 성취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만족을 알며 살줄도 안다. 그래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이를 지족자부(知足者富) 즉 “만족을 아는 자는 몸과 마음이 풍부하다”라고 할 수 있다. 즉 분수를 알며 만족해야 하며, 그런 만족을 아는 이는 마음이 부자라는 뜻과도 통한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처럼 살기에 늘 바쁘며 그런 가운데서도 즐겁다는 뜻이다.

반면, 어진 사람은 청산(靑山)처럼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한 절에 늘 머물고 있는 승려를 청산이라고도 하니 해석이 맞을 것도 같다. 나아가 어진 사람은 그 뜻을 움직이지 않고 늘 변하지 않는 듯 고요한 삶을 살기에 오래 산다는 표현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의 오래 산다는 것은 수명이 길다는 뜻도 있겠지만, 그의 어진 행동은 일희일비하지 않고 인생을 긴 호흡으로 즉 긴 안목으로 본다. 그래서 후세에 길이 그 이름을 남길 정도로 오래 간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청산에 올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며, 그런 비전과 이상을 간직하여 늘 이웃이 찾거나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진 사람을 대별하듯이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방편상의 구분이지 실제로 지혜로운 사람이 곧 어진 사람이며 어진 사람이 곧 지혜로운 사람이다. 결국 성인과 현자의 삶을 말하는 것으로 어짐이라는 인의(仁義)는 변하지 않고 천주부동(天柱不動) 즉 하늘의 기둥처럼 중심을 지키며 움직이지 않지만,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은 늘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물처럼 늘 순리대로 살면서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도 지쳐서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부지런히 노력한다는 뜻이다. 지혜롭고 어진 사람을 청산유수(靑山流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서 지치고 힘들수록, 인의로 세상을 밝히고 지혜를 발휘하고 실천하면서 소확행을 즐긴다. 그러면서도 늘 남에게 베풀며 아니 나누며 함께 사는 방법을 우리는 수천년전의 논어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이 있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뜻으로 글씨에는 성정과 인품이 반영된다고 한다. 서예를 공부한 적도 없고 오히려 악필이었기 때문에 늘 이 말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인품이 성장할수록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다해 결국 서체도 같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자기만족에도 불구하고 ‘지자락’이런 글씨를 어떻게 서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늘 궁금했다. 그런 가운데 우연히 김순환 서예가의 글씨를 접하고 연락을 취해서 만났다.

사진에 보이는 글씨 ‘樂’에 대해서 김순환 서예가는 “전세계 지구촌 모든 이들은 피부 색깔만 다를 뿐 같다고 생각하기에 서로 마주보고 웃으면서 어깨동무하고 신명나게 춤추는 형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도 인자한 사람도 모두 한 사람이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함께 하면서 손뼉을 치며 즐긴다면 이것이 바로 함께 하는 즐거움을 정말 제대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오랜만에 참 마음에 드는 묵적(墨跡)을 접했기에 기꺼이 소개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 서예가 김순환은 난정(蘭亭)과 청허(淸虛)라는 2개의 호를 쓰고 있다. 난정서예연구원 원장으로 중국 하얼빈사범대학 국제교육학원 종신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초대서예개인전 및 서예작품집 출간기념회(한국미술관)를 연 바 있고, 올해 2020년 제39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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