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성찰배경: 지구에 인류가 출현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중독되기 쉬운 인간의 속성상, 인간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혈연(血緣)과 지연(地緣)과 학연(學緣)에 의해 선(善)한 관계와 악(惡)한 관계가 뒤섞인 상태에서 공존해 왔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대체로 언론매체들이 미담(美談)보다는 주로 지도층 인사들의 악(惡)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끊임없이 기사화하고 있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선(善)한 관계에 관한 세속적인 인연들을 중심으로 미담 사례를 다룬 다음, 이의 바탕이 되는 ‘법연(法緣)’, 즉 법[眞理]에 뿌리를 둔 인연(因緣)에 대해 함께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 혈연(血緣)과 지연(地緣)

지연(地緣) 즉, 경주라는 지리적 연고(緣故)를 바탕으로 최진립(崔震立, 1568-1636)으로부터 12대 최준(崔浚, 1884-1970)까지 약 400년간이나 혈연(血緣) 부자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최부잣집의 비결(秘決)은 이구동성으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할 수 있는 멋진 가훈(家訓)에 있다고 합니다. 이는 언론을 통해 늘 인용되고 있듯이 집밖 일에 대해 지켜야 할 여섯 가지 외훈(外訓)과 집안 일에 대해 지켜야 할 여섯 가지 내훈(內訓)입니다.

먼저 지연과 관계된 외훈(外訓)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높은 지위를 탐하지 않는다. (이는 지위를 이용해 부정부패의 유혹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게 합니다.) 2. 재산을 만 석 이상 모으지 않는다. (이는 감당할 수 없는 부의 축적이 본인은 물론이고 자녀들까지도 쉽게 타락시키는 것을 방지하게 하는 동시에, 만석이 넘는 초과 이익을 소작농에게 재분배하여 신바람 나게 일하게 합니다.) 3.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않는다. (이는 평년 같으면 충분히 1년 양식을 마련할 수 있는 자작농들이 흉년이 들면 연명하기 위해 할 수 없이 헐값에 땅을 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로 인한 원성을 미연에 방지하게 합니다.) 4. 찾아온 손님을 잘 대접한다. (이는 다녀간 손님들로 하여금 최씨 가문의 따뜻한 마음씨를 널리 알리게 합니다.) 5.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 (이는 최부잣집과 비록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지역 내 거주하는 어려운 이웃들과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을 본받게 합니다.) 6. 갓 시집온 며느리는 삼 년간 검소한 옷을 입는다.”

그런데 이 가운데 핵심은 여섯 번째에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며느리가 3년 동안 근검절약하는 태도를 익히는 과정을 통해, 집안에 모아진 재물을 지혜롭게 선용(善用)하는 나머지 다른 가훈들도 저절로 체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육연(六然)이라고도 부르는 혈연과 관계된 자기성찰을 통한 마음수양 지침인 내훈(內訓)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2. 남에게 늘 부드럽게 대한다. 3. 일이 없을 때는 편안하게 지낸다. 4. 일이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대처한다 5. 뜻대로 이루었을 때도 담담하게 처신한다. 6. 뜻대로 이루지 못했을 때도 태연하게 처신하자.”

그런데 이 가운데 핵심은 첫 번째에 있는 것 같습니다. 즉 홀로 고요한 곳에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평소 늘 단련하는 과정을 통해 다른 내훈들은 저절로 실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녀를 둔 기성세대의 경우 자녀들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앞길을 스스로 헤쳐 나아갈 수 있도록 초연히 지켜본다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낭패를 당할 일은 결코 없겠지요.

사실 필자의 견해로는 최부잣집 혈연 구성원들의 멋진 미담은 마치 계율(戒律)처럼 이 열두 가지 기본 지침을 삶 속에서 머리만이 아닌 온몸으로 이를 실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사료됩니다. 앞으로 비단 단체나 기업뿐만이 아니라 이 멋진 사례가 본보기가 되어 혈연중심의 성찰과 나눔 문화가 한국 전역으로 확산되기를 간절히 염원해 봅니다.

◇ 학연(學緣)

학연의 대표적인 본보기의 하나는 조선 후기에 형성된 실학파의 태두로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고 성품이 뛰어나면 제자로 받아들였던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과 그 문하생들이라고 사료됩니다. 그 가운데 특히 마침 독서의 계절을 맞이해 서자(庶子)란 신분 차별을 극복하고 마침내 거인으로 우뚝 섰던, 조선 당대 최고의 독서가로서 필자의 심금(心琴)을 울렸던 이덕무(1741-1793)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그는 연암 박지원과 담헌(湛軒) 홍대용(1731-1783)을 스승으로,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등과 벗으로 교유하면서 적지 않은 저작을 남겼는데, 훗날 아들 이광규에 의해 <청장관전서>로 집성되었습니다.

서자였던 그는 청년 시절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어 관직에 나아가 뜻을 펼칠 기회조차 없었는데도 초연하게 오직 책만 읽으며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읽는 바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가 38세 되던 1778년(정조 2년) 심념조(沈念祖) 대감이 중국 사신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심대감은 정규직 수행원 대부분은 고관대작의 자제들로, 이들 대부분은 별 노력 없이 부모 찬스로 과거시험에 무난히 합격했기 때문에 실력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골치가 아프던 차에 갑자기 이덕무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즉시 기별을 보내 그를 일회성 수행원으로 삼아 함께 가게 되었는데, 과연 예상한 대로 그는 연경에서 청나라 준재들과 거침없이 필담을 주고받으며 조선 인재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고 합니다. 귀국 후 재능을 인정받아, 1779년 비정규직이기는 하지만 규장각 외각 검서관에 임명됩니다. 그리고 1781년에는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요직인 규장각 내각 검서관에 임명되었으며, 1784년 마침내 정규직인 경기도의 적성(지금의 파주) 현감(縣監)에 부임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4년간 기강을 바로잡는 동시에 도둑까지도 배려하며 감화시키는 등 어진 정치를 베풀었습니다. 그후 정규직 규장각 내각 검서관에 임명되며 중앙으로 복귀하였습니다. 특히 그가 재능 있는 서얼을 차별하는 관행의 문제에 대해 1791년 국가 발전과 백성을 위한 신념으로 당당하게 목숨을 걸고 정조임금과 담판을 벌렸다는 기록은 우리 모두 깊이 성찰해 볼 일입니다.

사실 필자의 견해로는 38세까지 백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책을 읽으며 학문에 힘썼던 그가 마침내 그 역량을 인정받아 관직에 나아갔으며, 그 맡은 직을 신명을 다해 수행한 삶은 바른 독서 태도를 통해 성찰한 깊은 통찰 체험이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삶이라 사료됩니다. 따라서 우리 기성세대 모두 이런 점들을 본받는 동시에 21세기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며 버거워하고 있는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이덕무의 치열했던 삶의 여정도 두루 알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편 그는 스승인 박지원의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들에게 이롭고 나라 살림에 살찌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본받아야 한다. 비록 그 법이 오랑캐라고 손가락질하는 청(淸) 나라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렇다’라는 가르침을 늘 가슴 깊이 새기며 ‘새로운 것을 대하거나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늘 조선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의 생활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가장 중요한 주제로 여기며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이들을 일깨우고자 하는 태도를 잘 엿볼 수 있는 몇몇 언구들을 골라 뽑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분의 굴레가 있는 현실 속에서 나와 같은 서자들은 변두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일생을 놓고 보면 누가 중심이고 누가 변두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는 스스로가 중심인 것이다.’

‘너와 나를 차별하는 마음을 잊기만 한다면야, 싸움이나 전쟁이 어떻게 일어날까?’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즐겨 하여, 용이 품은 여의주(如意珠)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의주를 품은 용 또한 여의주를 뽐내면서, 말똥구리가 말똥 굴리는 것을 비웃지 않는다.’

‘세상의 평화란 별 게 아니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은 존경하여 흠모하고, 나와 동일한 사람은 서로 아끼며 사귀되 함께 격려하고, 나만 못한 사람은 딱하게 여겨 가르쳐 준다. 이렇게 한다면 온 세상이 평화롭게 될 것이다.’

사실 누구나 ‘나’와 ‘너’가 둘이 아닌 ‘자타불이(自他不二)’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해 실천한다면 국가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인간 사회 조직 속에 내재되어 있는 온갖 갈등들이 대부분 다 사라질 것입니다. 또한 그는 금수저건 흙수저건 신분을 초월해 깊은 내적 통찰 체험을 바탕으로, 있는 그 자리에서 각자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어려운 이웃과 함께 더불어 지혜롭게 나눔 실천적 삶을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점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 법연(法緣)

불교경전 가운데 ‘어리석은 이’를 ‘도둑’에 비유하며, 영적 스승이 혈연과 지연 및 학연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도 인연 닿는 어리석은 이들과 법연을 맺으며 이들을 지혜롭게 교화하는 네 단계로 구성된 ‘동사섭(同事攝)’이란 가르침이 있습니다.

먼저 1단계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대화 상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같이 도둑질을 해서 친구가 되어야겠지요. 즉, 교화시키고자 하는 도둑과 동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2단계는 한동안 묵묵히 함께 도둑질을 하다가 틈을 보아 “우리가 비록 남의 재물을 훔치는 도둑이긴 하지만, 정당하게 돈을 벌어서 부자 된 사람의 돈을 훔쳐서야 되겠냐? 앞으로는 부정부패나 비리로 돈 번 부자들 집들만을 골라서 털자!”라고 설득을 하는 겁니다. 아무리 어리석어도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니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러다가 더욱 신뢰를 얻으면서 재물이 이제 쌓일 만큼 쌓이고 나면 3단계로 넘어갑니다. 또 틈을 보아 “우리가 아무리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의 재물을 훔치긴 하지만, 이 도둑질하는 행위 자체는 나쁘지 않냐? 우리는 이제 평생 먹고 살 만큼 재물을 모았으니, 이걸 가지고 논밭을 사서 소작인을 두고 떳떳하게 농사짓고 사는 게 어떠냐? 또한 그동안 운이 좋아 아직까지 잡히지는 않았지만 도둑질을 한 다음 발을 쭉 뻗고 편안히 잠을 잔 적이 있었냐?”라고 설득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동사섭의 백미(白眉)인 마지막 4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재물을 많이 모았으며 또한 땅도 많이 소유해 대지주가 되었기 때문에, 곳간에 쌀이 넘쳐나서 썩게 될 지경에 이르지 않았냐! 사실 우리가 그동안 도둑질을 하며 죄를 많이 지었는데, 이제 속죄(贖罪)하는 심정으로 이 쌀들이 썩기 전에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면 좋지 않겠냐?”라며 자비(自悲) 실천행의 길로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필자의 경우 형편없던 마마보이가 20세였던 1975년 종달(宗達) 이희익(1905-1990) 선사님과 맺은 법연을 통해 향상(向上)의 길을 걷다가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 체험을 더욱 철저히 다져오다가 선사 입적 직후인 1990년 뒤를 이어 길벗[道伴]들과 함께, 종교를 초월해 힘닿는 데까지 ‘동사섭’의 지혜를 바탕으로 새로운 법연을 지어가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사회적 거리를 두고 있는 이때, 틈날 때마다 내적 성찰을 통해 우리 모두 어디에도 걸림 없는 법연을 바탕으로 자신이 속한 가문(家門)이 ‘혈연부패집단’이 아니라, 지연과 학연을 잘 선용하며 어려운 이웃과 함께 더불어 향상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멋진 ‘혈연나눔공동체’로 발돋움하기를 간절히 염원 드리며 두서없는 이 글을 마칩니다.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전공분야: 입자이론물리학)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1989년 9월부터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강대 물리학과장, 교무처장, 자연과학부 학장을 역임했다.

한편 1975년 10월 임제종 양기파의 법맥을 이은 선도회 초대 지도법사이셨던 종달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스승이 제시한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이후 지금까지 선도회(2009년 사단법인 선도성찰나눔실천회로 새롭게 발족)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한편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께 두 차례 입실 점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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