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6 22:25
[이영종의 ‘평양에선 지금’] 장마당 탄압, 북한 주민 산소호흡기 떼는 격
[이영종의 ‘평양에선 지금’] 장마당 탄압, 북한 주민 산소호흡기 떼는 격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 승인 2020.11.3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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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북한 장마당이 심상치 않다. 대북제재에다 코로나19 비상방역 사태, 그리고 지난 여름 수해와 태풍까지 겹친 상황에서 식량과 생필품 조달 창구인 장마당이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인 것이다. 물가는 뛰고 환율마저 불안한데 피비린내 나는 처형 소식까지 들린다. 겨울 추위가 벌써부터 한창인 북녘 땅 주민들의 고단함이 드러난다.  

그동안 장마당을 둘러싼 이런저런 전언이나 미확인 보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국가정보원이 국회 정보위원회 보고를 통해 밝힌 내용이란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11월 말 열린 국회 정보위에 참석한 정보위원들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10월 말 환율이 급락했다는 이유로 평양의 거물 환전상을 처형하도록 했다. 또 8월에는 코로나19 방역 차원의 물자반입 금지령을 어긴 노동당 핵심 간부도 처형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북중 간 교역 규모는 지난 1∼10월 5억30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비상방역에 따른 여파로 중국으로부터의 물자 반입이 중단되면서 설탕과 조미료 등 식료품 물가가 4배 이상 치솟았다는 보고도 있었다. 특히 1만6,500원 선을 유지하던 조미료는 7만5,900원으로, 연초 1㎏에 6,000원대였던 설탕은 2만7,800원으로 폭등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김정은 위원장의 비이성적 판단이나 지시 때문에 벌어진다는 것이다. 북한은 바닷물이 코로나19로 오염된다는 이유로 어로와 소금생산까지 중단했다. 정보위원인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김정은 위원장의 이상행동에 대해 “외부물자를 안 받고 스트레스가 높고 하니까 감정 과잉이나 분노 표출도 종종 있고 그러다 보니 비합리적 지시도 많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동안 북한 장마당은 주민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산소호흡기와 같은 역할을 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과 이어진 대홍수와 기근으로 대랑 아사자가 발생한 이른바 ‘고난의 행군’ 때부터 장마당은 민생의 조달창구가 됐다. 

식량과 물품의 부족으로 노동당의 배급망이 완전히 붕괴하자 농산물을 시작으로 농민 시장 형태의 장마당이 생겨났다. 텃밭이나 뙈기밭에서 기른 채소를 내다 팔던 시장은 점차 옥수수빵이나 국수 같은 쪽으로 폭을 넓혔고, 공산품이 등장하면서 인기를 더하게 됐다. 과자와 비누·칫솔·샴푸 같은 물품이 인기를 끌었고 특히 초코파이와 믹스커피, 천하장사 소시지 등 한국산 제품까지 은밀하게 거래됐다.

북한은 초기엔 장마당에 대해 단속과 허용을 오가는 모습을 보였고, 2009년 말에는 장마당의 신흥 자본가 그룹인 ’돈주‘의 장롱 속 돈을 환수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 들어 장마당에 대한 단속이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장마당은 커져갔다. 심지어 북한의 명문대학인 김일성대와 김형직사범대의 교수도 장마당 장사에 뛰어든다고 한다. 

한 탈북 고위인사는 “예전에 부부가 김일성대 교수면 가문의 영광이었는데, 이젠 한국말로 하면 하우스 푸어 신세가 된다”고 말했다. 시장 환율(1달러 당 북한 돈 8,000원 수준)로 1달러도 안 되는 5,000원 월급을 부부가 받아봤자 생활이 되지 않고, 노동당에서 준 아파트 한 채만 덜렁 남게 된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민 사이에서 “노동당보다 장마당”이란 말이 입에 오르내린다고 한다. 조선노동당은 민생을 내팽개쳤지만, 장마당은 숨통 역할을 해 준다는 의미다. 

김정은 위원장은 ’핵 강국‘을 외치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성공으로 ”미국 본토를 사정권 안에 두게 됐다“고 위협한다. 하지만 달러의 맛에 빠진 주민들은 ”미국 할아버지(100달러에 새겨진 벤저민 프랭클린을 지칭)가 최고“라고 여긴다고 한다. 중국 할아버지(100위안에 그려진 마오쩌둥)에 이어 ‘수령님’(북한 화폐의 김일성을 지칭)이 제일 마지막이란 비아냥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다시는 우리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듬해 3월에는 핵 개발 덕으로 국방비를 민생에 돌릴 수 있게 됐다며 경제·핵 병진 노선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병진 노선은 사실상 철회됐고, 지난해 12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다시 허리띠를 조이자”며 7년 전 약속을 공수표로 만들었다.

북한 경제는 꼬일 대로 꼬여가고 있다. 말 그대로 악화일로다. 김정은 위원장이 추대된 2016년 5월 7차 노동당 대회 때 발표한 5개년 경제전략(2016~2020년)의 마지막 해를 맞았지만, 북한은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했고 인민생활도 미진했다”며 일찌감치 실패를 자인했다. 그런데도 반성이나 전략수정은 없이 내년 1월 노동당 8차 대회에서 새로운 비전을 밝히겠다고 시간을 미뤘다. 

그리고는 지난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행사를 치르고 나자마자 주민들에게 당 8차 대회까지 ‘80일 전투를 전개하자’고 다그치고 있다. 공장이나 협동농장 등에서 생산력 증대를 위한 노력 경쟁 운동에 돌입하자는 얘기다.

주민을 끊임없이 고단한 삶 속으로 내밀고, 생존을 의지하던 장마당까지 단속과 처형의 장으로 만든 상황 속에서 애민정치는 찾아볼 수 없다. 김정은 위원장이 당창건 75주 열병식 연설에서 “미안하다”를 연발하며 울먹인 게 ’악어의 눈물‘이어선 안 될 일이다.